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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해설] 유안진의 "말 궁합"
문학/출판/인문
[ 이승하의 하루에 시 한 편을 ]

[시 해설] 유안진의 "말 궁합"

이승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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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하의 하루에 시 한 편을 124]

 

말 궁합

 

유안진

 

시인 김삿갓에게는 썩은 고지바가지에 탁배기가

시인 김병연(金炳淵) 씨에게는 이 빠진 막사발에 막걸리가

시인 난고(蘭皐) 선생께는 금이 간 사기잔에 약주가

어울릴 것 같다

 

—『둥근 세모꼴』(서정시학, 2011)  

김삿갓 [이미지:류우강 기자]

 [해설] 

 

  말 궁합이 안 맞는 시대

 

  김삿갓은 별칭이고 김병연은 본명이고 난고는 김병연의 호(號)이므로 동일인이다. 유안진 시인은 김삿갓을 운위할 때는 “썩은 고지바가지에 탁배기”를 마시고 있다고 해야지 제격이란 생각을 해보았다. 그리고 시인 김병연 씨라고 부를 거라면 “이 빠진 막사발에 막걸리”를 마시고 있다고 해야지 제격이란 생각을 해보았다. 마지막으로 난고 선생 운운할 거라면 “금이 간 사기잔에 약주”를 드시고 있다 해야지만 제격이란 생각을 해보았다. 즉, 말은 궁합이 맞아야 하는 것임을 이 시를 통해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그런데 이 시를 쓴 2010년 무렵이나 15년이 흐른 지금이나 우리가 궁합이 맞지 않는 말을 쓰는 것은 다를 바 없다. 백화점이나 편의점에 가서 찾는 물건이 있는지 물어보면 종종 “그 물건 없으세요”라는 답을 듣는다. 알바몬에서 조사한 적이 있는데 우리가 자주 쓰는 엉터리 존댓말로 그 메뉴는 안 되세요, 이렇게 하시면 되세요, 주문되셨어요, 좋은 하루 되세요, 이쪽에서 기다리실게요, 주문하신 것 나오셨어요, 그건 제게 여쭤보세요, 결제되셨습니다, 접수되셨습니다 등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손아랫사람에게 낮춤말을 듣기도 한다. 몇몇 시인이 문법 파괴에 앞장서도 누구 한 사람 나서서 말리지 않았다. 우리는 지금 언어 혼란, 아니 언어 파탄의 시대를 살고 있다. 시라는 것이 궁극적으로는 말 궁합임을 알고 있다면 비문투성이의 시를 쓰지는 않을 텐데, 안타까울 따름이다. 어휘 선택이 뒤죽박죽이라 영어를 넣어 쓴 이런 글을 외국인들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지난 십수년 동안 내 눈에 들어온 글자로 희망 플러스 통장ㆍ한강 르네상스 프로젝트ㆍ클린 재정ㆍ서울 비전 체계ㆍ시민 패트롤ㆍ서울 사랑 커뮤니티ㆍ서울리뉴얼ㆍ비전 갤러리ㆍ그린 트러스트ㆍ하이서울 리포트ㆍ서울메트로 모니터ㆍ시니어 패스ㆍ하이서울 페스티발ㆍ천만상상 오아시스ㆍ서비스 매뉴얼ㆍ비전 서울 핵심 프로젝트ㆍ희망 드림 프로젝트ㆍ시민행복 업그레이드ㆍ클린 운영ㆍ서울형 데이케어 센터 등은 영어 사랑의 산물이다. 몇 해 전에 읽은 글 중에 “온라인 신청방법은 아이사랑보육보털 사이트에 회원가입을 하시고, 온라인 개인정보 활용 동의 후 어린이집을 선택해 입소 대기 신청을 하시면 됩니다.”가 있었다. 한글을 한국인이 죽이고 있지 않은가. 유안진 시인의 말 궁합의 의미를 잘 생각해 보도록 하자.

   

  [유안진 시인]

 

  1941년 경상북도 안동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및 동 대학원에서 교육심리학을 전공하고 미국 플로리다 주립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교수로 활동하다 2006년부터 서울대학교 명예교수로 발령받았다. 대한민국예술원의 회원과 한국시인협회 고문으로 있다. 1965년 박목월 시인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을 통해 시단에 등단했다. 첫 시집 『달하』를 간행한 이후 『물로 바람으로』『월령가 쑥대머리』『봄비 한 주머니』 등의 시집과 시선집을 출간했고, 수필집 『우리를 영원케 하는 것은』『축복을 웃도는 것』『지란지교를 꿈꾸며』 등과 장편소설 『바람꽃은 시들지 않는다』『땡삐』 등이 있다. 한국시협상, 정지용문학상, 목월상, 한국펜문학상, 구상문학상, 공초문학상, 김달진문학상, 김삿갓문학상, 유심작품상, 이형기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이승하 시인,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시집 『우리들의 유토피아』『욥의 슬픔을 아시나요』『생명에서 물건으로』『나무 앞에서의 기도』『생애를 낭송하다』『예수ㆍ폭력』『사람 사막』 등

 

평전 『청춘의 별을 헤다-윤동주』『최초의 신부 김대건』『마지막 선비 최익현』『진정한 자유인 공초 오상순』

 

지훈상시와시학상편운상가톨릭문학상유심작품상서울시문화상 등 수상

 

코리아아트뉴스 전문위원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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