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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하의 하루에 시 한 편을 206] 이용호의 "그림자"
문학/출판/인문
[ 이승하의 하루에 시 한 편을 ]

[이승하의 하루에 시 한 편을 206] 이용호의 "그림자"

이승하 시인
입력

그림자

 

이용호

 

야간 경비 일을 마치고 아침에 퇴근하시는

아버지의 모자는 항상 비뚤어져 있었다

학교 가는 길에 딱 마주친 내게 무심한 듯 작심한 듯

왼쪽으로 흘려보내는 아버지의 눈길이

큰길 하나를 통과하고 있었다

아버지 차라리 그림자나 되세요

아버지가 계셔서 사라지는 게 많다고 생각했던 시절

원망의 목소리는 뱃속에서 머뭇거렸고

그럴 때마다 책가방을 쥔 손엔 힘이 들어갔었다

저 멀리 아버지의 그림자가 보이면

눈을 감고 작은 골목길로 숨기도 했었다

 

아버지의 검은 경비 모자챙에는

땀에 전 소금기가 제 몸을 비비려는 듯

새록새록 돋아나고 있었고

파스를 붙인 팔뚝에선 하얀 목련꽃도

자신의 허벅지를 절뚝이며 눈을 감고 있었다

그늘로만 다니시며 하얀 땀들을 식히는 동안

아버지, 평생을 그렇게 허물어져 가시고

닳아가기만 하는 아버지의 그림자마저

한쪽으로 기울어지는 것을 나는 보고 있다

훌쩍 자란 자식들이 훨훨 그림자를 벗어나던 순간에도

아마 이만큼이면 됐다고 저만치 우리들의 모습을

검은 모자챙 안에 새기고 싶으셨을 것이다

 

내디디며 몰아치는 세월들이

끝내 남은 생에도 기울어지는 시간

나의 그림자도 이제는 서서히 기우는 밤

나는 아버지의 검은 모자를 끌어안고

먹먹한 눈길을 또 옛날로 돌리고 있다.

 

―『너와 나의 중립국』(북인, 2024)

 

아버지는 늘 외로웠을 것이다 [ 이미지 : 류우강 기자]

  [해설

 

   아버지는 늘 외로웠을 것이다

 

  이 시 속의 아버지는 직업이 야간 경비원이라 아침에 퇴근하였다. , 박봉을 받고 있어 충실한 가장 노릇을 못하고 있을 확률이 높다. 학생인 화자는 아버지가 계셔서 사라지는 게 많다고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으니 존경했을 턱이 없다. 평소에 경원시하였고, 때로는 원망하는 마음이 솟구치기도 했을 것이다. 친구들 앞에서 아버지를 자랑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열등감이 컸을 테니 아버지의 그림자가 보이면 눈을 감고 작은 골목길로 숨곤 했던 아이의 슬픔이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

 

  하지만 아버지는 노름꾼도 아니고 술고래도 아니었다. 모자챙에 밴 소금기와 파스 붙인 팔뚝이 무엇을 뜻하는지 차츰 알게 되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가장으로서 최선을 다하며 살아간 사람이었다. 화자는 어른이 되고 가장이 되고 중년이 되면서 아버지를 차츰 이해해 가게 된다. 아버지의 점점 더 구부정해지는 어깨와 휘는 허리를 보았는데 아뿔싸, 내가 아버지의 허물어져 가는 모습을 닮고 있다니!

 

  세월 앞에 장사 없다는 말이 있는데, 진리다. 인간이 어떻게 생로병사를 거부할 수 있으랴. 만나면 헤어지는 것이 세상의 법칙인데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일까. 살아 계시면 언젠가는 눈을 감을 것이다. “나는 아버지의 검은 모자를 끌어안고/ 먹먹한 눈길을 또 옛날로 돌리고있으니 이제 좀 철이 들었나 보다.

 

  이 세상의 아버지 중에는 부자도 있고 빈자도 있다. “애비는 종이었다로 시작하는 서정주의 시와 지상에는 아홉 켤레의 신발로 시작하는 박목월의 시가 생각난다. 이 세상에는 죽으라 하고 일을 하고도 인정받지 못하는 아버지들이 있다. 그 아버지들의 그림자가 길어지고 있다. 회사에서, 공장에서, 가게에서, 운전 영업을 마치고 기진하여 귀가한 아버지를 위하여 세상의 자식들이여, “아버지! 오늘 많이 힘드셨죠?”라고 한마디 하는 것이 어떨지? 그리고 아버지를 와락 안아드리면 감동에 몸을 떨 것이다.

 

  [이용호 시인]

 

  서울 출생. 2010년 계간 《불교문예》 신인문학상으로 등단했다. 시집 『유배된 자는 말이 많다』『내 안에 타오르던 그대의 한 생애』『팔순의 어머니께서 아들의 시집을 읽으시네』를 냈다. 2020년 아르코 문학창작기금, 2022년 아르코 문학창작기금(발표 부문), 2024년 문학창작산실 발표 지원금을 받았다. 교단문예상, 목포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이승하 시인,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이승하 시인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시집 『우리들의 유토피아』『욥의 슬픔을 아시나요』『생명에서 물건으로』『나무 앞에서의 기도』『생애를 낭송하다』『예수ㆍ폭력』『사람 사막』 등

 

평전 『청춘의 별을 헤다-윤동주』『최초의 신부 김대건』『마지막 선비 최익현』『진정한 자유인 공초 오상순』

 

지훈상, 시와시학상, 편운상, 가톨릭문학상, 유심작품상, 서울시문화상 등 수상

 

코리아아트뉴스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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