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해설] 최종천의 "침묵의 언어"
침묵의 언어
최종천
나뭇잎들이 흔들리며 반짝이는 것은
사람으로 치자면 말을 하는 것일까
이 그늘 아래서라면 나는 입을 다물고
나무들이 읽어주는 경전을 들어보리라
해마다 수천 권의 책이 출판되고
영화와 연극이 공연되는 대명천지에
지금은 헤어진 그녀도 나더러
주둥이 하나로 먹고살 생각을 하라고
이제 노동을 그만하라고 넌지시 충고하는
눈부신 지식산업과 문화의 세기에
나무들은 부는 바람에 춤을 추는구나
일을 하는구나 일을 하는구나, 땅을
깊고 넓게 일구고 있구나
말이야말로 기술적으로 해야 하는 것이다
최소한 신에게 변명을 하기 위해 맨 처음
입을 열어 핑계를 댄 아담 정도는
되어야 말을 하는 것이다
나의 말을 훔쳐간 한 권의 시집을
지금 누군가가 읽고 있으리라
내가 생산한 의미를
누군가가 써먹고 있을 것이다
나무 그늘 아래서 나무가 쓴 경전을 읽어본다
나무의 언어는 나무 자체이다
나무의 언어는 나무로 실존하고 있다
나무의 언어는 그 자체가 목적이다
인간의 언어는 사물의 말을 듣기 위한 방법이다
노동은 본래 그런 침묵의 언어였다
나는 인권 대신 물권(物權)을 주장하리라
사물이 나에게 증여한 이 언어로
―『나의 밥그릇이 빛난다』(창비, 2007)

[해설]
침묵이냐 발언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최종천 시인이 영원히 침묵하게 되었다. 향년 71세, 오랫동안 노동현장에서 용접 일을 하였다. 이 시는 시를 몰랐던 노동자 시절과 시를 쓰게 된 1986년 이후의 삶의 차이에 대해 다루고 있다. 시를 쓰지 않아도 되던 시절에는 아무리 오래 침묵을 해도 살아가는 데 아무 지장이 없었다. 그런데 내가 시를 쓰자 애인은 노동을 그만하고 주둥이로 먹고살 생각을 하라고 충고한다. 노동판에서 살 때는 열심히 일만 하면 되었지만 시를 쓰면서 “눈부신 지식산업과 문화의 세기에” 들어와 버리고 말았다. 난처하게 되었다.
아담의 예도 그렇고, 말이 문제다. 노동은 원래 침묵의 언어였는데, “나의 말을 훔쳐간 한 권의 시집을/ 지금 누군가가 읽고 있으리라”고 생각하니 뒷골이 땅긴다. “내가 생산한 의미를/ 누군가가 써먹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해진다. 즉 침묵은 사람을 안정되게 하지만 문자 행위는 사람을 불안하게 한다. 입을 열어 말을 하면 실수를 하게 마련이고, 펜을 들어 글을 쓰면 비문투성이일지 모른다. 평론가들이 씹을지도 모른다. 노동시는 한물갔어요. 박노해와 백무산과 김신용과 박영근과 다른 점은?
최종천 시인이 이 시를 쓴 이유가 분명하다. ‘나무의 언어’를 줄이고 앞으로는 ‘인간의 언어’를 널리 쓸 생각을 했다는 것이다. 판에 박힌 말을 하는 사람이 시인이 아니라 자기만의 말을 하는 사람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시인은 그 당시, 시를 쓸 수 없는 침묵의 언어를 무시하고 독창적이고 독보적인 말로 인간을 그리고자 하였다. “노동은 본래 그런 침묵의 언어였”으나 어쩔 것인가. 노동현장에서 침묵하다가 시를 쓰면서 입을 열었는데 이제 다시 영원히 침묵하게 된 최종천 시인의 명복을 빈다.
[최종천 시인]
최종천은 1986년 《세계의문학》을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눈물은 푸르다』『나의 밥그릇이 빛난다』『고양이의 마술』『인생은 짧고 기계는 영원하다』『그리운 네안데르탈인』이 있고 산문집으로 『노동과 예술』이 있다. 제20회 신동엽창작상, 제5회 오장환문학상을 받았다.
이승하 시인,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시집 『우리들의 유토피아』『욥의 슬픔을 아시나요』『생명에서 물건으로』『나무 앞에서의 기도』『생애를 낭송하다』『예수ㆍ폭력』『사람 사막』 등
평전 『청춘의 별을 헤다-윤동주』『최초의 신부 김대건』『마지막 선비 최익현』『진정한 자유인 공초 오상순』
지훈상, 시와시학상, 편운상, 가톨릭문학상, 유심작품상, 서울시문화상 등 수상
코리아아트뉴스 전문위원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