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탐방 인터뷰] “버려진 것들 속에 시대의 흔적이 있습니다” 설치미술가 조현경
9월 17일, 서울 인사아트센터 5층 경남관. 전시 개막 첫날, 관람객들 사이로 묵직한 오브제들이 시선을 끈다. 폐기된 전자 부품, 플라스틱, 자동차 파편들이 조형물로 재탄생한 이곳은 설치미술가 조현경의 제7회 개인전 『풍요–디자이너를 위한 기념비Ⅱ』가 열리는 현장이다.
낡고 버려진 사물들이 새로운 생명력을 얻어 공간을 채우는 순간, 관람객은 단순한 미적 경험을 넘어, 시대와 기억, 인간의 흔적을 되짚는 깊은 사유의 장으로 들어서게 된다. 이 전시는 물질적 풍요 속에서 점점 잊혀져가는 우리들의 서정을 되찾고자 하는 예술적 제안이자, 잊힌 존재들을 위한 조용한 기념비다
류안 발행인이 전시장에서 작가 조현경을 직접 만나, 그의 예술 세계와 이번 전시에 담긴 철학을 들어보았다.
“풍요는 기억의 복원입니다”

류안: 작가님, 이번 전시 제목이 ‘풍요’입니다. 어떤 의미를 담고 계신가요?
조현경: ‘풍요’는 단순한 물질적 개념이 아닙니다. 제가 자란 마산의 부림시장, 전후의 가난한 시절을 떠올리면, 물질은 부족했지만 마음은 풍요로웠어요. 기워 신던 양말, 장난감이 춤추던 시장통, 극장 간판을 그리던 문신 선생님의 흔적들… 그 시절은 꿈이 있었죠. 지금은 물질적으로 풍요롭지만, 정신적으로는 빈곤한 시대입니다. 그래서 이 전시는 ‘부끄러운 풍요’에 대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디자이너를 위한 기념비는 제의입니다”
류안: ‘디자이너를 위한 기념비’라는 부제가 인상적입니다. 어떤 의도에서 비롯된 건가요?
조현경: 디자이너들은 늘 새것을 만들어야 하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아이디어와 시도, 실패가 사라집니다. 저는 그들의 고민과 수고를 기억하고 싶었어요. 폐기된 부품 속에 그들의 흔적이 남아 있거든요. 그래서 이 전시는 일종의 제의(祭)입니다. 잊힌 존재들을 위한 기념비죠. 그들의 창조적 흔적을 예술로 되살리는 작업입니다.
“오브제는 나의 언어입니다”
류안: 작가님의 작업은 오브제 중심입니다. 설치미술로 확장하게 된 계기가 있으신가요?
조현경: 처음엔 유화, 수채화, 판화 등 다양한 장르를 시도했어요. 하지만 평면 작업은 시각적 한계가 있었죠. 오브제는 입체적이고, 모든 방향에서 시선을 유도할 수 있어요. 주변의 사물들이 화자가 되어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들과 대화하면서 서사가 생기고, 그 서사가 조형으로 이어집니다.

류안: 작업 방식도 독특하다고 들었습니다.
조현경: 폐기된 부품들을 모듈화해서 조립하고, 침전시키고, 널어놓고, 쌓아요. 마치 레고처럼요. 단순한 재활용이 아니라, 새로운 미의식의 창출입니다. 기술은 매체를 대신하고, 상품은 표현의 도구가 됩니다.

“예술은 시대를 읽는 몸짓입니다”
류안: 작품 속에 시대적 메시지가 강하게 느껴집니다.
조현경: 예술은 시대를 읽는 언어라고 생각해요. 인간조차 상품처럼 소모되는 현실에 저항하고 싶어요. 그래서 제 작업에는 결핍, 욕망, 유희, 저항 같은 이야기가 담깁니다. 과거의 사물은 현대사회를 읽는 기호이자 상징이죠.

류안: 존경하는 예술가나 영향을 받은 인물은 누구인가요?
조현경: 박서보 화백의 “화가의 길은 긴 호흡과 먼 안목으로…”라는 말이 아직도 제 지침입니다. 뒤샹, 백남준, 아르떼 포베라, 신사실주의 작가들, 그리고 K. 슈비터즈의 ‘메르쯔 빌터’에 깊이 공감합니다.

“작업은 삶의 일부입니다”
류안: 작업 공간이 창원에서 왕복 100km 거리라고 들었습니다.
조현경: 정수예술촌에 작업장이 있어요. 철책의 추위도 잊게 만드는 공간이죠. 도회지에서 재료를 구하기 쉬워서 집 근처에 방 두 개를 얻어 수장고로 쓰고 있어요. 작업은 제 삶의 일부입니다. 늘 관람객을 배려하는 마음으로 현대성을 추구하려고 합니다.

류안: 앞으로의 작업 방향은 어떻게 구상하고 계신가요?
조현경: 지금은 ‘침전’과 ‘퇴적’이라는 장르를 실험하고 있어요. 우리 세상은 이렇게도 표현될 수 있다는 제시와 주장입니다. 앞으로도 일상의 진부한 현상을 감각적 사건으로 전환하는 작업을 계속할 겁니다. 예술은 결국 이음의 작업이니까요.
작가 조현경은 인터뷰 말미에 설치미술을 시작하려는 후배들에게 따뜻한 조언을 건넸다. “예술에는 정답이 없습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상상력과 방향을 믿고 도전해보세요. 무엇보다도 끈기를 가지고 임하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그의 말처럼, 예술은 정답을 찾는 여정이 아니라 자신만의 언어를 구축해가는 과정이다.
[ Short 동영상 인터뷰]
조현경 작가는 이번 전시를 통해 예술이 단순한 시각적 표현을 넘어, 시대를 읽고 기억을 복원하는 언어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폐기된 오브제들이 작가의 손을 거쳐 새로운 생명력을 얻는 순간, 관람객은 물질적 풍요 속에 묻힌 인간의 흔적과 감정을 되짚는 깊은 사유의 공간으로 들어서게 된다. 이는 단순한 미적 경험이 아니라, 시대와 인간, 그리고 존재의 의미를 되묻는 철학적 제안이다.
이번 『풍요–디자이너를 위한 기념비Ⅱ』 전시는 한국 컨템포러리 아트의 지형에서 보기 드문 설치미술 작업으로, 현대인의 정서를 깊이 있게 포착하고 있다. 폐기된 오브제들이 예술로 재탄생하는 순간, 관람객은 마치 뉴욕 첼시가의 설치미술 작품을 마주한 듯한 강렬한 인상을 받는다.
시대를 읽는 몸짓으로서의 예술, 그 중심에 조현경이 있다. 앞으로의 작업 역시 기대를 모은다.
[정리 : 류우강 기자]
[한만인이 간다: 취재 동영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