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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해설] 한영옥의 "이유 없던 날"
문학/출판/인문
[ 이승하의 하루에 시 한 편을 ]

[시 해설] 한영옥의 "이유 없던 날"

이승하 시인
입력
[이승하의 하루에 시 한 편을 70]

이유 없던 날

 

한영옥

 

생각할수록 무거워지고 있었다

불쾌를 감당하며 꽤 헤매다가

야간 식당에 들어가 간신히 주저앉혔다

 

늦은 시간인데 따끈한 밥이 나왔다

두어 수저 밥이 남아 가는데

반찬들이 먼저 비워졌다

 

조용히 접시를 바꿔 주는 식당 사람

짭짤한 깍두기를 거의 입에 넣고서

천천히 문을 닫았다, 감사합니다

 

불쾌와 깍두기를 바꿔 먹은 날

손해 본 것 굳이 없는 그저 그런 날

승객들 틈에서 온기를 모으며 귀가했다

 

짜게 먹을 이유 굳이 없었던 날.

 

―『허리를 굽혔다, 굽혀 준 사람들』(청색종이, 2024) 

  

깍두기 [ 이미지: 류우강 기자]

  [해설

 

  작은 친절이 필요한 세상

 

  살다 보면 타인의 언행으로 상처받는 경우가 있다. 나를 불쾌하게 하는 일이 종종 일어나 분을 가라앉히느라 애를 먹기도 한다. 이 시의 화자도 머리가 점점 무거워지고 있었다. “불쾌를 감당하며 꽤 헤매다가/ 야간 식당에 들어가 간신히나를 주저앉히고는 저녁을 시켰다. 늦은 시각인데 따끈한 밥이 나온 것이 뜻밖이었다. 먹다 보니 밥은 아직 좀 남았는데 깍두기 반찬이 떨어졌다.

 

  바로 그때였다. 반찬을 더 달라는 말을 하지 않았는데 식당 사람이 조용히 다가와 접시를 바꿔 주는 것이 아닌가. 이 시에서 가장 중요한 표현이 천천히 문을 닫았다이다. 보통 마음의 문을 닫았다는 뜻으로 써 한자어로 바꾸면 단절, 외면, 중단 같은 것이 되는데 이 시에서는 짭짤한 깍두기를 거의 입에 넣고서다음에 나오고 바로 감사합니다로 이어지기 때문에 부정의 뜻이 아니다. 마음속으로 감사를 표했다는 뜻이 아닐까.

 

  깍두기 반찬 덕분에 내 마음을 억누르고 있던 불쾌함이 사라졌다. 흔히 말하는 똔똔이 되었다. 그래서 화자는 승객들 틈에서 온기를 모으면서 귀가할 수 있었다. 새로 나온 깍두기를 안 먹고 나오면 실례라고 생각해 화자는 깍두기를 거의 다 먹고 식당을 나왔을 것이다. 짜게 먹을 이유도 굳이 없었지만 식당 사람의 친절한 행위를 무시할 수는 없었을 테고 집에 가서 물을 벌컥벌컥 마셨을 것이다. 마지막 문장은 제목과 연결된다. 식당 사람의 행위는 손님에게 응당 하는 습관적인 행위였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소소한 친절이 우리로 하여금 살맛 나게 하는 경우가 많다. , 이런 작은 친절과 배려가 널리 행해지면 우리 사회는 좀 더 밝아질 것이다.

 

  한영옥 시인이 내일 안성의 조병화문학관에서 제35회 편운문학상을 수상한다. 평론 부문에서는 고형진 전 고려대 교수가 받는다. 두 분의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한영옥 시인]

 

  1973년 《현대시학》을 통해 등단했다. 시집으로 『비천한 빠름이여』『아늑한 얼굴』『다시 하얗게』『슬픔이 오시겠다는 전갈』『사랑에 관한, 짧은』 등이 있다. 천상병시상, 최계락문학상, 한국시인협회상, 전봉건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성신여대 국문과 교수를 거쳐 지금은 명예교수로 있다

이승하 시인,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이승하 시인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시집 『우리들의 유토피아』『욥의 슬픔을 아시나요』『생명에서 물건으로』『나무 앞에서의 기도』『생애를 낭송하다』『예수ㆍ폭력』『사람 사막』 등

 

평전 『청춘의 별을 헤다-윤동주』『최초의 신부 김대건』『마지막 선비 최익현』『진정한 자유인 공초 오상순』

 

지훈상시와시학상편운상가톨릭문학상유심작품상서울시문화상 등 수상

 

코리아아트뉴스 전문위원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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