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음악

[이 한장의 음반] 한 장의 그림과 처연한 선율이 만나다… 치코(Cico)의 『Notte』

최재우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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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라 비스타리니의 동화 같은 앨범 커버와 이탈리아 아트록의 쓸쓸한 밤

음반을 듣는다는 것은 음악만을 듣는 일이 아니다. 오래된 LP 한 장을 꺼내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마주하는 것은 소리가 아니라 ‘그림’이다. 음악이 턴테이블 위에서 흘러나오기 전부터 앨범 커버는 이미 우리에게 그 음반이 들려줄 세계를 암시한다.

치코(Cico) 1974년 앨범 ”Notte“카를라 비스타리니(Carla Vistarini) 작품

오늘 소개할 한 장의 음반은 이탈리아 아트록 그룹 포뮬라 쓰리(Formula 3)의 드러머로 활동했던 안토니오 ‘토니’ 치코(Antonio “Tony” Cico)가 ‘치코(Cico)’라는 이름으로 발표한 1974년 첫 솔로 앨범 『Notte』다.

 

그러나 이 앨범을 이야기하면서 음악만큼이나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다. 바로 앨범의 아름답고 독특한 커버를 그린 이탈리아의 만능 예술가 카를라 비스타리니(Carla Vistarini)다.

 

작사가·작곡가·극작가·일러스트레이터… 카를라 비스타리니

 

1948년 로마에서 태어난 카를라 비스타리니는 한 가지 직함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예술가다.

카를라 비스타리니(Carla Vistarini) 

작사가이자 작곡가이고, 시나리오 작가이며 극작가이고, 일러스트레이터이자 예술감독으로도 활동했다. 이탈리아 대중문화와 엔터테인먼트 분야에서 여러 영역을 넘나들며 자신의 재능을 펼쳐온 인물이다.

 

그녀는 이탈리아 저작권청(SIAE)에 400곡이 넘는 노래를 등록했으며 미나(Mina), 오르넬라 바노니(Ornella Vanoni), 미아 마르티니(Mia Martini), 패티 프라보(Patty Pravo), 리카르도 포글리(Riccardo Fogli), 페피노 디 카프리(Peppino di Capri), 로레타 고지(Loretta Goggi), 라파엘라 카라(Raffaella Carrà), 레나토 제로(Renato Zero) 등 이탈리아 대중음악을 대표하는 수많은 가수들과 작업했다.

 

그녀의 활동 영역은 음악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1991년부터 1998년까지 이탈리아 Rai Uno에서 방송된 ‘파바로티와 친구들(Pavarotti & Friends)’ 관련 프로그램의 작가로 활동했으며, 영화 『Nemici d'infanzia』로 1995년 다비드 디 도나텔로상(David di Donatello Award) 각본 부문을 수상했다.

 

1997년에는 세계적인 음악가 조르조 모로더(Giorgio Moroder), 피노 도나지오(Pino Donaggio)와 함께 산레모 음악축제의 예술감독을 맡기도 했다.

 

노래를 쓰고, 이야기를 만들고, 방송과 무대를 기획하며 그림까지 그린 예술가. ‘만능 아티스트’라는 표현이 과하지 않은 이유다.

 

음악을 쓰고, 가사를 쓰고, 그림까지 그리다

 

『Notte』는 비스타리니의 여러 재능이 한 장의 음반 안에서 특별하게 만난 작품이다.

 

그녀는 이 음반의 커버를 직접 그렸을 뿐만 아니라 앨범의 작사와 작곡에도 참여했다. 특히 수록곡 ‘Se mi vuoi’를 비롯한 앨범 전체의 가사를 담당했다.

 

앨범 표지를 바라보고 있으면 현실과 꿈의 경계 어딘가에 머무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동화책의 한 페이지처럼 낯설면서도 따뜻하고, 조금은 쓸쓸하다.

 

비스타리니는 작사·작곡과 방송, 영화 분야에서 워낙 큰 활동을 펼쳤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그의 미술 작업은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예술감독으로서 무대미술과 공간 연출에도 관여했던 그의 이력을 생각하면 시각예술에 대한 감각 역시 결코 우연이 아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Notte』의 앨범 커버는 많지 않은 그의 회화·일러스트레이션 작업 가운데서도 음악과 그림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작품으로 기억할 만하다.

 

포뮬라 쓰리의 드러머에서 솔로 가수 ‘치코’로

 

이제 음반 속 음악으로 들어가 보자.

 

치코의 본명은 안토니오 ‘토니’ 치코다. 1949년생인 그는 이탈리아 아트록 그룹 포뮬라 쓰리의 드러머로 활동했다. 포뮬라 쓰리는 이탈리아 프로그레시브 록과 아트록을 이야기할 때 빼놓기 어려운 그룹 가운데 하나다. 이후 토니 치코는 자신의 이름을 간결하게 ‘Cico’로 바꾸고 1974년 첫 솔로 앨범 『Notte』를 발표했다.

 

국내에서도 1970~80년대 유럽 프로그레시브 록과 아트록을 즐겨 들었던 음악 애호가라면 치코라는 이름이 낯설지 않을 것이다. 당시 라디오를 통해 유럽의 프로그레시브 록을 국내에 적극적으로 소개했던 성시완을 통해 이 음반과 음악을 접한 이들도 적지 않았다.

 

가을밤처럼 스며드는 ‘La Notte’

 

『Notte』에서 가장 오래 기억에 남는 곡은 역시 앨범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La Notte’다. ‘Notte’는 이탈리아어로 ‘밤’을 뜻한다.

곡은 처연한 피아노 소리와 함께 아주 조용하게 시작한다. 치코의 목소리 역시 처음에는 마치 누군가에게 혼잣말을 건네듯 낮고 조심스럽다. 그러나 음악은 조금씩 달라진다. 잔잔하게 흐르던 목소리에 감정이 쌓이고, 멜로디는 점차 높아진다. 속삭이던 노래는 어느 순간 절규에 가까운 애절함으로 변한다.

 

마치 오래전 떠나간 누군가를 부르는 듯하고,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을 붙잡으려는 듯하다. 화려한 연주나 과장된 장식이 없어도 음악이 사람의 마음 깊숙한 곳까지 들어올 수 있다는 사실을 이 곡은 보여준다.

 

특히 가을 저녁에 들으면 그 느낌이 더욱 깊다.

 

한여름의 뜨거운 기운이 사라지고 바람 끝에 조금씩 서늘함이 묻어나는 계절, 해가 짧아지면서 어느 날 문득 지나간 시간과 사람들을 떠올리게 되는 계절과 ‘La Notte’는 묘하게 닮아 있다.

 

앨범의 마지막 곡이지만 단순한 ‘마지막 트랙’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처음부터 끝까지 쌓아온 『Notte』라는 한 편의 이야기를 완성하는 피날레다. 한 곡만으로도 이 앨범을 기억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말하고 싶다.

 

한 장의 음반 속에서 그림과 음악은 하나가 된다

 

좋은 앨범 커버는 음악을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음악을 듣기 전에 하나의 감정을 먼저 건네준다.

 

카를라 비스타리니가 그린 『Notte』의 표지도 그렇다. 동화적이면서도 어딘가 낯설고, 아름다우면서도 쓸쓸하다. 그리고 음반의 마지막에서 ‘La Notte’를 듣고 나면 비로소 그 그림이 왜 이 음반과 잘 어울리는지 조금씩 이해하게 된다.

 

비스타리니가 그린 그림과 치코가 노래하는 밤.

 

1974년에 만들어진 이 오래된 한 장의 음반 속에서 그림과 음악은 반세기가 흐른 지금도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 어쩌면 LP 한 장을 듣는 즐거움은 바로 이런 데 있을 것이다.

 

소리를 듣다가 그림을 바라보고, 그림을 바라보다 다시 음악을 듣는 것.

그리고 어느 가을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감정 하나를 다시 꺼내 보는 것.

오늘 밤에는 치코의 ‘La Notte’를 한 번 들어보시길 권하고 싶다.

 

그 첫 피아노 음이 울리는 순간, 아주 오래된 이탈리아의 어느 밤이 우리 곁으로 조용히 다가올지도 모른다.

 

음반 정보

아티스트: Cico(안토니오 ‘토니’ 치코)
앨범명: 『Notte』
발표: 1974년
주요 수록곡: ‘La Notte’, ‘Se mi vuoi’
앨범 커버: Carla Vistarini
작사·작곡 참여: Carla Vistarini

 

글 ㅣ최재우 문화예술기획 제이비엠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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