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해설] 구상의 "초토의 시 8ㅡ적군 묘지 앞에서"
[이승하의 하루에 시 한 편을 98]
초토의 시 8
ㅡ적군 묘지 앞에서
구상
오호, 여기 줄지어 누웠는 넋들은
눈도 감지 못하였겠구나.
어제까지 너희의 목숨을 겨눠
방아쇠를 당기던 우리의 그 손으로
썩어 문드러진 살덩이와 뼈를 추려
그래도 양지 바른 두메를 골라
고이 파묻어 떼마저 입혔거니
죽음은 이렇듯 미움보다도 사랑보다도
더욱 신비로운 것이로다.
이곳서 나와 너희의 넋들이
돌아가야 할 고향 땅은 30리면
가로막히고
무주공산(無主空山)의 적막만이
천만 근 나의 가슴을 억누르는데
살아서는 너희가 나와
미움으로 맺혔건만
이제는 오히려 너희의
풀지 못한 원한이 나의
바램 속에 깃들어 있도다.
손에 닿을 듯한 봄 하늘에
구름은 무심히도
북으로 흘러 가고
어디서 울려오는 포성(砲聲) 몇 발
나는 그만 이 은원(恩怨)의 무덤 앞에
목놓아 버린다.
—『적군 묘지 앞에서』(나무와숲, 2024)

[해설]
오늘은 현충일입니다.
현충일에 감상할 만한 시가 흔치 않은데, 구상의 이 시는 6월 6일 오늘 읽기에 아주 적합하다. 한국전쟁은 이른바 동족상잔(同族相殘)이었지만 외국의 20개국 젊은이들이 참전하여 죽어간 국제전쟁이었다. 중공군이 제일 많이 죽었고 미군도 적지않이 죽었다. 흑석동에 자리 잡고 있는 학교에서 근무하고 있는데 바로 옆에 국립서울현충원이 있다. 몇 년에 한 번은 가보는데, 단장이 잘 되어 있다. 아이가 있는 집에서는 6월 중에 아이를 데리고 가면 산 교육장이 될 것이다.
신앙의 근본은 ‘용서’다. 이 정신에 기반한 인류애적 사랑과 인간에 대한 깊은 연민의 정을 담아 쓴 「적군 묘지 앞에서」는 전쟁의 비극을 휴머니즘으로 초극하려는 의지가 엿보인다. 총탄에 맞아 죽은 이의 시체가 산야에 나뒹굴고 있으면 반경 10미터는 악취가 진동한다. 적의 시체를 모아서 일일이 봉분을 만들었다. 알고 보면 전사자가 친구의 친구의 아들일 수도 있고 친척의 친척의 아들일 수도 있다. 이 많은 인민군의 시체를 어떻게 할 것인가?
이른바 ‘적군 묘지’가 지금은 경기도 파주군 적성면 답곡리에 가면 잘 조성되어 있다. 한국전쟁 직후에는 원통, 양주, 대전 등지에 산재해 있었다. 시인은 적군 묘지를 한곳에 모으면서 행해진 위령제에 참석했던가 보다. 국군들이 만들어준 인민군 묘지인데 북한에도 국군들이 묻힌 묘지가 있는지 궁금하다. 시는 이렇게 끝난다―“나는 그만 이 은원(恩怨)의 무덤 앞에/ 목놓아 버린다.”고. 적이긴 했지만 친척을, 친구를, 이웃을 죽이는 전쟁을 3년 1개월 동안 했다. 기가 막힌 비극을 연출하면서 지켜낸 우리나라, 우리 땅이다. 오늘 현충일을 경건한 마음으로 보내도록 하자.
[구상 시인]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이중섭 화백의 작품을 판 1억원을 이웃을 위해 스스럼없이 내놓은 것을 비롯해 투병 중에도 장애인 문학지 《솟대문학》에 그동안 아껴 두었던 2억원을 쾌척하는 등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에 늘 관심을 가져왔다. 이처럼 성자(聖子)와도 같은 삶을 살았던 구상 시인은 지병인 폐질환이 악화된 데다 교통사고 후유증까지 겹치면서 중환자실과 일반 병실을 오가며 힘들게 병마와 싸우다가 끝내 2004년 5월 11일 사랑하는 아내와 두 아들이 기다리는 하늘나라로 떠났다. 동서양의 철학이나 종교에 조예(造詣)가 깊어 존재론적ㆍ형이상학적 인식에 기반한 독보적인 시 세계를 이룩한 시인. 현대사의 고비마다 강렬한 역사의식으로 사회 현실에 문필로 대응, 남북에서 필화(筆禍)를 입고 옥고를 치르면서까지 지조를 지켜 온 현대 한국의 대표적인 전인적 지성이다.
이승하 시인,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시집 『우리들의 유토피아』『욥의 슬픔을 아시나요』『생명에서 물건으로』『나무 앞에서의 기도』『생애를 낭송하다』『예수ㆍ폭력』『사람 사막』 등
평전 『청춘의 별을 헤다-윤동주』『최초의 신부 김대건』『마지막 선비 최익현』『진정한 자유인 공초 오상순』
지훈상, 시와시학상, 편운상, 가톨릭문학상, 유심작품상, 서울시문화상 등 수상
코리아아트뉴스 전문위원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