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하의 하루에 시 한 편을 192] 반혜정의 "요양원 일기—남자, 세월에 묵살당하다"
요양원 일기
—남자, 세월에 묵살당하다
반혜정
지나간 것은 청춘이요
다시 오지 않을 것도 청춘이요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내게도 청춘은 있었다오
땀으로 세월을 살아냈건만 남겨진 것은
빈 껍질 같은 몸
남자의 호흡이었던 가족
땀방울이 맺힌 불끈했던 힘줄에 매달린 것이
세월에 헐거워진 몸 밖으로
새어 나가고 있었을까
삭아 뚝뚝 떨어져 가는 붉었던 생이 떨리는데
아무리 둘러봐도 익숙한 사람들이 없다
낯선 방이 공포로 환하다
사방이 벽이고 들어오는 문은 있어도 나가는 문이 없는
세상과 단절되는 이곳에서
머리에 박혔던 별들과 발바닥에 박힌 못을 빼고
호흡이었던 그 얼굴들을 지우고
이제는 홀로 서는 법을 익혀야 한다
—『요양원 편지』(도서출판 오감도, 2017)

[해설]
우리 모두의 마지막 길
시집의 거의 절반인 26편이 「요양원 일기」 연작시이다. 시집의 해설을 보니 시인의 어머니가 치매 환자로서 7년 동안 요양원에서 지내다 돌아가셨다고 한다. 면회 갈 때마다 여러 환자의 여러 경우를 목격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 앞에 놓인 운명이 시인의 어머니처럼 되지 않고 천수를 다 누릴 뿐 아니라 자다가 스르르 숨을 거두는 ‘임종’일까? 그런 경우는 백 명에 한 명, 아니, 천 명에 한 명일 것이다.
시인은 한 남자의 요양원 생활을 살펴보면서 그의 과거지사를 재구성해본다. 팔팔했던 청춘이 가고 빈 껍질 같은 몸이 남았다. “남자의 호흡이었던 가족”과 헤어져 요양원에 와 있는데 아무리 둘러봐도 낯익은 사람이 없다. 다 낯설고 모든 것이 생소하다. 아아, 낯선 방이 공포로 환하다. 요양원(療養院)이란 데는 이름은 그럴듯하지만 “사방이 벽이고 들어오는 문은 있어도 나가는 문이 없는/ 세상과 단절되어 있는” 곳이다. “머리에 박혔던 별들”, 즉 기쁨과 영광의 나날과 “발바닥에 박힌 못”, 즉 고난과 상처의 나날도 모두 기억에서 지워지고 없다. 내 호흡이었던 아내와 자식 혹은 친구와 친지, 동료의 얼굴들도 다 지워지고 없다. 세월을 묵살당한 사내, 이제 홀로 서는 법을 익혀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다. 째깍째깍 시간만 가고 있다.
우리 모두 매일 한 번씩 “메멘토 모리!(죽음을 기억하라!)” 하고 마음속으로 외친다면 생활이 훨씬 더 여유롭고 자유로워질 것이다. 30〜40대 때 교수로서 강의 시간에 학생들에게 꾸지람을 많이 했다. 학생들이 나를 무서워했다. 50대 때는 강의 방식이 서서히 유해져 내가 생각해도 부드러운 교수가 되었다. 교육 방법론이 학생 스스로 자신의 부족한 점을 깨닫게 하는 식으로 바뀌어 갔고, 60대가 되어서는 교재까지 사주는 친절 본위의 교수가 되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다 암으로 돌아가시자 꾸지람이 능사가 아님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메멘토 모리! 죽음에 대한 인식이 생에 대한 태도를 바꾸었다. 부메랑처럼 베풀어도 돌아오고 해코지해도 돌아오는 것이 세상의 이치다. 언젠가 요양원에서 만날 이웃이여.
[반혜정]
경남 거제 출생. 2014년 계간 《시선》으로 등단, 고성문인협회, 전국편지마을 회원.
이승하 시인,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시집 『우리들의 유토피아』『욥의 슬픔을 아시나요』『생명에서 물건으로』『나무 앞에서의 기도』『생애를 낭송하다』『예수ㆍ폭력』『사람 사막』 등
평전 『청춘의 별을 헤다-윤동주』『최초의 신부 김대건』『마지막 선비 최익현』『진정한 자유인 공초 오상순』
지훈상, 시와시학상, 편운상, 가톨릭문학상, 유심작품상, 서울시문화상 등 수상
코리아아트뉴스 전문위원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