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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하의 하루에 시 한 편을 ]

[이승하의 하루에 시 한 편을 283] 이명의 "빛나는 노점" 외 1편

이승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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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나는 노점 1

 

이명

 

강변역 3번 출구 건널목

고추 몇 됫박 앞에 두고 앉아 있는 할머니

힘주어 또박또박 쓴

청양이라는 글씨 삐뚤빼뚤하다

어느 누구 하나 거들떠보는 이 없지만

얼마 되어 보이지 않는

다만 저렇게 수다스러웠을 것 같은

붉은 날들을 토해놓고

하나둘 집어 들어 먼지를 닦아낸다

지나간 날들을

정성스레 닦고 또 닦으며

옹기종기 모여 앉아 빛났던 날들을 추스르고 있다

사람들은 무심히 지나가고

낮도 다 지나가고

어둠이 무서리처럼 내려앉는 시간

흩어진 날들을 주워 담아 손수레에 싣는다

먼 집에서는 바람이 차가울 것이지만

쏟아놓은 붉은 날들 수북이 쌓여

방바닥은 따뜻할 것이다

눈부실 것이다

 

 

주인은 나를 차에 태우고 먼 길을 와

산기슭에 두고 갔다

 

몇 번을 짖으며 쫓아갔지만

끝까지 따라가지 않았다

 

나는 주인을 알고 있다

주인의 사랑을 기억하고 있다

 

더 크게

무위자연이 되라는

주인의 마음이 읽히기 때문이다

 

산은 높았고 나는 산을 지키기로 했다

 

—『개』(문창, 2025)

개 _ 이명 시인 [그림 : 류우강 기자]

  [해설]

 

   사랑을 하기에도 너무 짧는 생

 

  강변역 3번 출구 건널목에 갈 일이 없으니 고추를 파는 할머니가 계신지 안 계신지 알 수 없다. 지금도 그곳에 계시면 언제 시간 내어 가서 고추를 사 드리고 싶다. 매운 것을 잘 못 먹으니 사놓고 나선 어떻게 할지 몰라 쩔쩔매겠지만 말이다. , 이 할머니 온종일 앉아 계셨지만 거의 팔지 못했나 보다. 손수레에 싣고 집에 가서 방바닥에 쌓아놓을 것이다. 붉은 날들, 빛나는 노점이니 햇볕이 잘 들어야 할 텐데, 시인도 안타까워하고 나도 안타깝다.

 

  묵이나 청국장, 더덕을 사 갖고 오는 날이 있다. 노점상 할머니가 어서 귀가하여 저녁 식탁 준비를 하길 원하는 마음에서이다. 이것이 사랑인지 동정심인지 연민인지 모르겠지만 할머니도 나도 같은 시대에 살아 있고 때가 되면 황천행 승용차를 탈 터이니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싶은 것이다.

 

  시집의 제목으로 삼은 시는 유기견의 실태를 말해주는 내용이다. 여름 휴가철 동해안 관광지에 유독 유기견이 많아져서 그에 따라 유기견 보호센터 직원들의 할 일이 많아진다고 한다. 이렇게 버려지면 야생으로 돌아가거나 병으로 죽거나 보호센터에서 생과 사의 갈림길에 서게 된다.

 

  개를 유기하는 이유는 성견이 되면서 귀염성이 사라짐, 아무 곳에나 변을 보는 습관, 멍멍 짖어댐으로써 접하게 된 이웃의 항의, 사료비 부담, 입원비와 수술비 부담, 이사 감, 주인의 입원이나 요양원행 등 여러 가지일 텐데 어쨌거나 개의 수난은 끊임이 없다. 주인하고 산책 나온 개들이 내 눈에는 다 귀엽고 다 불쌍하다. 개를 유기하지 말자고 외치고 싶다. 개를 화자로 삼은 이 시의 주인공은 도사연하지만 엄청난 고독감과 좌절감을 느낄 것이다. 이웃이여 개를 사랑하며 살아도 우리의 생은 짧다.

 

  [이명 시인]

 

  이명 시인은 경북 안동에서 태어났고 2011<불교신문> 당선. 시집으로 『분천동 본가입납』『앵무새 학당』『벌레문법』『벽암과 놀다』『텃골에 와서』『기사문을 아시는지』『산중의 달』, e북 『초병에게』, 시선집 『박호순미장원』이 있다. 2013목포문학상을 수상. 현재 《문학의 창》 발행인. 출판사 문창대표.
 

이승하 시인,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이승하 시인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시집 『우리들의 유토피아』『욥의 슬픔을 아시나요』『생명에서 물건으로』『나무 앞에서의 기도』『생애를 낭송하다』『예수ㆍ폭력』『사람 사막』 등

 

평전 『윤동주-청춘의 별을 헤다』『최초의 신부 김대건』『마지막 선비 최익현』『진정한 자유인 공초 오상순』

 

지훈상, 시와시학상, 편운상, 가톨릭문학상, 유심작품상, 서울시문화상 등 수상

 

코리아아트뉴스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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