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하의 하루에 시 한 편을 274] 우은숙의 "우리들의 고흐"
우리들의 고흐
우은숙
전시장 벽면에 붕대로 감싼 당신
당신의 얼굴에 내 얼굴을 들이밀고
그립다
말하다 말고 그만 입을 다뭅니다
지하철 창에 기대 입술을 깨무는 사람
편의점 불빛 아래 이력서 고치는 사람
푸른 밤
그들 손끝에도 당신이 있습니다
내 눈 속에 푸른 밤을 가만히 당깁니다
또 다른 당신과 당신 사는 세상에서
깊은 밤
곤히 잘 수 있게
꿈결마다 편안하게
—《시와 징후》(2025년 겨울호)

[해설]
고흐를 닮은 사람들
지구상에 37년 4개월 머물렀지만 빈센트 반 고흐는 900여 점의 그림과 1100여 점의 습작품을 남겼다. 광기에 사로잡히기 전 10년 동안 엄청난 양을 그렸다. 유화는 살아생전 단 한 작품 팔렸는데 1890년에 <아를의 붉은 포도밭>을 안나 보흐라는 인물이 400프랑에 구입했다. 유화를 제외한 것까지 친다면 화상이던 삼촌의 주문으로 헤이그 풍경을 담은 스케치 12점으로 20길더를 받은 바 있다. 지독하게 가난했고, 생애 내내 인정받지 못했다.
우은숙 시인은 고흐를 시조의 화폭 안에 그리고 있지만 생전의 고흐가 아니라 우리 시대의 고흐를 그리고 있다. 19세기 네덜란드에서 살다 간 비운의 화가 고흐는 생시에는 불운했지만 사후에는 최고의 평가를 받았고 받고 있다. 19, 20, 21세기의 전 세계 모든 화가 중에서 고흐만큼 위대한 화가는 있을 수 있겠지만 고흐보다 위대한 화가는 없다. AI가 고흐를 흉내 내어 그림을 그릴 수는 있지만 고흐의 독창성에는 절대로 범접할 수 없다.
그런데 우은숙은 고흐 생전의 불운과 사후의 영광을 그리지 않고 ‘우리들의 고흐’를 그리고 있다. “지하철 창에 기대 입술을 깨무는” 불행한 사람과 “편의점 불빛 아래 이력서 고치는” 불운한 사람에게 관심이 많다. 고흐는 그래도 살아생전에 예술혼을 불태웠고 사후에는 최고의 현대 화가로 평가를 받았지만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수많은 이들의 삶은 누추하고 꿈은 피폐하다. 우은숙 시인에게는 궁핍한 그들이 바로 고흐다.
내 눈 속에 푸른 밤을 가만히 당기는 이유는 무엇일까? 고흐도 생애 내내 많이 힘들었겠지만 지금 이 시대에도 힘들게 살아가는 이들이 있음을 말하면서 그들의 가치를 논하고 있다. 고흐 당신만큼이나 운수 없는 사람들이 이 땅에 많은데, 그들이 깊은 잠 곤히 잘 수 있으면, 꿈결마다 편안하면 좋겠다고 시인은 말한다. 평범한 사람들이 편안하게 살아가는 세상에 대한 꿈을 피력함으로써 우은숙 시조시인은 민중시인이 되었다. 귀족과 반대되는 의미로서의 ‘민중’은 변동사회의 주역이다. 이 짧은 시조 속에 우은숙 시인은 우리 시대의 몇몇 초상화를 그려 넣었다.
[우은숙 시인]
199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경희대학교 문학박사. 시조집 『물무늬를 읽다』『붉은 시간』『그래요, 아무도 모를 거예요』를, 평론집 『생태적 상상력의 귀환』을 냄. 아르코창작지원금 수혜. 중앙일보시조대상 신인상, 김상옥시조문학상 등 받음.
이승하 시인,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시집 『우리들의 유토피아』『욥의 슬픔을 아시나요』『생명에서 물건으로』『나무 앞에서의 기도』『생애를 낭송하다』『예수ㆍ폭력』『사람 사막』 등
평전 『윤동주-청춘의 별을 헤다』『최초의 신부 김대건』『마지막 선비 최익현』『진정한 자유인 공초 오상순』
지훈상, 시와시학상, 편운상, 가톨릭문학상, 유심작품상, 서울시문화상 등 수상
코리아아트뉴스 전문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