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희의 수필향기] 탱고, 그 관능의 쓸쓸함에 대하여 -맹난자
탱고, 그 관능의 쓸쓸함에 대하여
맹난자
봄이 이울자 성급한 넝클장미가 여름을 깨운다.
아파트 현관문을 나서다가 담장 밑에 곱게 피어난 장미 꽃송이와 눈이 마주쳤다. 투명한 이슬방울, 가슴이 뛴다. 그리고는 알 수 없는 통증이 한 줄기 바람처럼 지나가는 것이다. 6월의 훈향이 슬며시 다가와 관능을 깨운다. 닫혔던 내부로부터의 어떤 확산감을 느끼게 되곤 하던 것도 그러고 보면 매양 그 무렵이었다.
약속한 대로 나는 '예술의 전당' 앞에서 남편을 기다렸다. 아르헨티나에서 온 뮤지컬 <포에버 탱고>를 관람하기 위해서다. 내가 탱고를 보자고 제안했을 때, 그는 순순히 동의해주었다. 순순히라는 말 속에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뜻이 담겨 있는데 그것은 흔히 탱고를 관능과 외설, 즉 단정치 못한 어떤 것과 연관지어 생각하기 때문이다.

며칠 전 조간신문에서 '관능적 몸짓, 유혹의 노출'이라는 큰 제목 아래 소개된 <포에버 탱고> 댄서들의 사진을 보게 되었다.
아르헨티나의 고유 악기인 벤드오네온(아코디온의 변형 악기)이 상징물처럼 무대 중앙에 설정되어 있고,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밤 하늘에 슬픔의 고함처럼 울리던 그 벤드오네온의 선율이 오케스트라와 함게 울려 퍼지면서 댄서들의 춤이 시작된다.
말끔하게 턱시도를 차려입은 남성 댄서는 올백으로 붙여 빗은 머리에 거울처럼 반짝거리는 검정 구두를 신었다. 그런가 하면 여성 댄서들은 앞가슴의 풍만함을 엿보이도록 깊게 패인 드레스를 입고 될수록 몸의 곡선을 강조한 타이트한 실루엣, 높고 뾰족한 하이힐, 거기다 내면의 외로움을 무시하듯 함부로 치장된 금속성의 액세서리와 머리에 꽂은 가벼운 깃털과 구슬 핀의 섬세한 장식, 대각선으로 어깨를 맞대고 있는 남녀 댄서의 얼굴은 정지 신호에 걸린 듯 잠시 무표정하다. 투우사가 소를 겨냥할 때의 그것처럼 긴장감마저 든다. 그러나 빠르고 경쾌한 탱고 리듬의 스텝이 몇 번 어우러지더니 급한 회전을 이루며 이내 타오르는 장작불처럼 격렬함에 이르고 만다.
탱고는 원래 '만진다'는 뜻의 라틴어 '탕게레'에서 비롯되었다. 그래서 이 춤은 파트너 간의 밀착, 혹은 좀체로 끊어지지 않는 터치에 그 중점을 둔다고 말한다.
새로운 삶을 찾아 부에노스아이레스까지 흘러들어온 이민자들.
아프리카나 유럽 등지에서 떠나온 그들은 자신의 정체성과 스스로의 애환을 달래기 위해 밤이면 핸슨클럽에 모여들었다. 거기에서 그들만의 고유한 춤이 시작된다. 국가는 춤을 법으로 금지하기에 이른다.
탱고는 관능을 고조시키는 북의 단순 반복음, 원시성이 깃든 북의 반복음으로 시작된 룸바나 삼바의 기원에 그 뿌리를 둔다. 브라질계 아프리카 흑인 노예들이 아르헨티나에 전한, 그러니까 칸돔베스라는 춤이 탱고의 모체가 되는 것이다.
몸만큼 정직한 것이 있을까? 감정이 추운 것을 그들은 몸으로 부볐다.
"욕망과 외로움을 표현하는데 이보다 더 우아하고 솔직한 작품이 있을까?" '뉴스위크'는 <포에버 탱고>를 이렇게 평했다.
탱고는 결국 외로운 몸짓의 형상화라는 생각조차 들었다. 화려한 복장과 경쾌한 음악, 에로틱한 율동에도 불구하고 나는 왜 탱고를 관능의 허무와 동렬同列에 두고 바라보게 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무대 뒤에서 화장을 지우는 배우의 심정처럼 처연해지고 마는 것이다. 가면을 내려놓은 뒤 거울 속 자신의 얼굴과 마주한 느낌이라고나 할까. 사물의 뒷모습은 때로 앞모습보다 훨씬 본질적일 때가 있다.
관능의 열락悅樂과 축제 속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울고 있는 자신을. 그래서 탱고는 둘이 추면서 혼자인 춤. 무표정한 얼굴의 속마음. 그리고 그믐달보다도 더 매운 계집의 눈썹 같은 스타카토, 그 스타카토의 분명한 선을 기점으로 하여 안으로 파고드는 수렴의 감정, 더 철저하게 혼자가 되는 내성적內省的인 춤으로서의 탱고를 나는 좋아하게 되는 것이다.
오케스트라의 리듬에 맞춰 그들은 썰물과 밀물처럼 끌어당김과 떨어짐의 동작을 유연하게 되풀이한다. 그리하여 끝없이 이어지는 긴장과 이완, 철썩거리며 해안가에 밀물처럼 굽이쳐 들어왔다가 휘돌아나가고, 나가고 나면 다시 그 자리. 어찌할 수 없는 본원적인 자리일 터이다.
그것은 결국 우리로 하여금 맞닿을 수 없는 어느 허무의 벽을 짚게 하고야 말리라. 한 발자국 다가서면 또 한 발자국 비켜나는 자신의 그림자처럼, 어쩌면 몸이 도달하고 싶어하는 지점도 끝내는 허구虛構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양파 껍질처럼 한 겹, 한 겹 다 벗겨지고 나면 끝내는 망실亡失.
가서 맞닿지 못하는 허무虛無.그리하여 나는 현란한 불빛, 탱고 음악의 물결 바다, 섹슈얼리티의 무대라고 한 거기 노련한 동작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에로티시즘을 만날 수 없었다.
탱고, 그 관능의 쓸쓸함이 나를 쓸쓸하게 하였다.
객석에 불이 들어오고 나서도 우리는 한참만에 그 자리를 떴다.
밤 공기는 가을 하늘처럼 삽상하다. 돌층계를 막 내려서는데 불쑥 릴케의 시구詩句가 발등에 와 닿는다.
오! 장미여.
순수하나마
서러운 모순矛盾의 꽃.
(...)
이제는
누구의 것도 아닌 외로움을
고이 간직하고 있는
아름다움이여.
만약 릴케 선생의 허락이 있다면 이 시구를 탱고에게 헌시獻詩하고 싶었다. 그러나 어쩌면 그것은 내 자신에게 보내고 싶은 말이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심향 단상]
'탱고'와 '캉캉'은 너무도 다른 느낌을 주는 춤이다.
탱고가 두 사람이 손을 맞잡고 밀착하여 추는 춤이라서 관능적인 춤이라고 느끼는 것이 아닐까.탱고와 달리 캉캉춤은 여러 무용수가 일렬로 서서 빠른 음악에 맞춰 추는 빠르고 경쾌한 느낌을 주는 화려한 춤이다.
깊은 감정의 교류, 밀도 높은 연결, 걷기에서 오는 집중력 등은 탱고의 독특한 매력으로 감정과 호흡, 미세한 신체 움직임을 섬세하게 다뤄야 하는 춤으로, 배우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는 춤이라고 한다.
탱고는 음악의 해석, 정교한 리드, 즉흥적인 발기술 등을 통해 정서적 교감을 중시하는 특징이 있다. 화려한 기교보다 차분하게 걷는 기본 동작이 중요하며, 탱고 음악은 주로 4분의 2박자로 매 박자마다 강한 악센트가 들어가 절도 있고 정확한 표현을 요구하는 대표적인 커플댄스다.
탱고는 아르헨티나에서유래한 이민자들의 애환, 슬픔, 열정에서 비롯된 춤이고, 캉캉춤은 파리에서 유래한 여러 명이 경쾌한 음악에 맞춰 추는 춤이다.
탱고춤을 영상으로 보고 들은 생각은, 아름다운 춤으로 기회가 된다면 젊은 연인이라면, 배워볼 만한 춤이겠다는 느낌을 받았다. 춤을 추면서 서로를 끌어주고 배려하며 춰야 되는 춤인 것 같아서다.
화자는 탱고가 관능적이고 외설적으로 알고 있는 춤이지만 실제와는 다른 느낌을 받았다고 고백한다. 그 화려한 춤에서 오히려 외로움, 고독을 느꼈던 것이다. 연극이 끝나고 무대로 돌아와 가면을 내려 놓은 뒤 거울 속 자신의 얼굴과 마주했을 때, 화려해 보였던 앞모습과 다른 쓸쓸한 뒷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은 느낌. 그래서 공연이 끝나고도 그 자리를 쉽게 떠나지 못했던 것이다.
우리가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노래를 부르듯이, 춤추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춤으로 그 감정을 표현할 것이다. 춤과 음악이 어우러지면서 음악이 생동감있을 때는 기쁨과 행복을 나타내듯이, 음악이 잔잔하고 느리게 흘러갈 때는 우울한 느낌의 춤을 추게 될 것이다. 그처럼 춤도 음악에 맞춰서 기쁨을 표현하기도 하고, 슬픔을 표현하기도 한다.
무대의 조명이 꺼지고 배우가 옷을 갈아입으며 느낄 그 순간은 기쁨일 수도 있고, 슬픔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보통의 경우에 화려함 뒤에는 우수가 어려있을 수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모든 사람이 언제나 밝기만 하거나 늘 행복하거나 아니면 늘 슬프기만 하지는 않을 테니까.
너무 밝음 뒤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서려있을 수 있겠다. 그것은 서러운 모순이고 허무.
외로운 사람들.
인간은 모두 외로움을 지니고 태어나는가.
기독교에서 말하는 '원죄론'을 보면, 인간은 태어나면서 부터 죄를 짓고 태어나 고통을 받을 수 밖에 없다는 말을 심심치 않게 듣는다. 태초에 죄를 짓고 태어나서 이 생에 그 업을 받았을까.
크기의 차이가 있겠지만, 사람들마다 저 밑바닥에는 외로움과 아픔이 켜켜이 쌓여져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내 마음을 잘 살피고 자신을 깊이 들여다 봄으로써, 자신을 더 잘 이해하게 되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힘도 생길 수 있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외롭지 않은 사람이 없고, 아프지 않은 사람이 없고, 이 생을 영원히 살 사람도 없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영원히 살 수 없음을 아는 것이 외롭고 아픈 것일까. 생로병사.
종교적으로 더 깊이 있는 종교 철학자에게 물어야 할 일이겠다.
그래서 우리가 서로 좀 더 타인을 배려하고, 더 조심하며, 더 안쓰러운 마음을 갖고 더 진실하게 대하며 살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혹시라도 이 생에 지은 죄로 다음 생에 그 업을 받고 싶지 않으니까. 인생은 한 번이니까.
김영희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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