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하의 하루에 시 한 편을 346] 구상의 "초토의 시 8 —적군 묘지 앞에서"
초토의 시 8
—적군 묘지 앞에서
구상
오호, 여기 줄지어 누웠는 넋들은
눈도 감지 못하였겠구나.
어제까지 너희의 목숨을 겨눠
방아쇠를 당기던 우리의 그 손으로
썩어 문드러진 살덩이와 뼈를 추려
그래도 양지바른 두메를 골라
고이 파묻어 떼마저 입혔거니
죽음은 이렇듯 미움보다도 사랑보다도
더욱 신비로운 것이로다.
이곳에서 나와 너희의 넋들이
돌아가야 할 고향 땅은 30리면
가로막히고
무인공산의 적막만이
천만 근 나의 가슴을 억누르는데
살아서는 너희가 나와
미움으로 맺혔건만
이제는 오히려 너희의
풀지 못한 원한이 나의
바램 속에 깃들어 있도다.
손에 닿을 듯한 봄 하늘에
구름은 무심히도
북으로 흘러가고
어디서 울려오는 포성 몇 발
나는 그만 이 은원(恩怨)의 무덤 앞에
목놓아 버린다.
―『초토의 시』(청구출판사, 1956)

[해설]
그날의 추위에 비한다면
반공교육을 받으며 자라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음악 시간에 배운 박두진 작사, 김동진 작곡의 <6ㆍ25의 노래>가 지금까지도 뇌리에 선명히 새겨져 있어 반주 없이도 부를 수 있다. 가사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날을/ 조국을 원수들이 짓밟아오던 날을/ 맨주먹 붉은 피로 원수를 막아내어/ 발을 굴러 땅을 치며 의분에 떤 날을/ 이제야 갚으리 그날의 원수를/ 쫓기는 적의 무리 쫓고 또 쫓아/ 원수의 하나까지 쳐서 무찔러 이제야 빛내리 이 나라 이 겨레”에는 반공사상이 집약되어 있다.
그런데 비슷한 시기에 발표된 구상의 시는 시각이 좀 달랐다. 지금은 경기도 파주군 적성면 답곡리에 ‘적군 묘지’가 조성돼 있지만 한국전쟁 직후에는 원통, 양주, 대전 등지에 적군 묘지가 산재해 있었다. 시인은 그 어느 묘지에서 행해진 위령제에 참석했던 적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디서’ 울려오는 포성이라고 했으므로 전시 상황에 적군 묘지를 만들어주었을 수도 있다. 어제까지 목숨을 겨눠 방아쇠를 당겼지만 오늘은 그 손으로 적의 무덤을 만들어주고 있다.
동족상잔의 비극이었으므로 우리는 적이긴 했지만 친척을, 친구를, 이웃을 죽이는 전쟁을 하였다. 그런 비극적 현실 앞에서 시인은 목을 놓아 운다. 운다고 해서 이 시를 센티멘털리즘이라고 비판해서는 안 된다. 독자는 이 시에서 사랑과 용서를 가장 큰 정신적 덕목으로 삼고 있는 기독교정신과, 인간에 대한 신뢰와 자유에 대한 희구를 근본으로 하는 휴머니즘을 강하게 느끼게 될 것이다.
날씨가 꽤 추운데 이미 작고한 몇몇 어르신네들은 1951년 초, 1ㆍ4후퇴 때의 추위를 말씀하시곤 했다. 중공군이 대거 참전해 국군과 유엔군이 서울에서 철수한 날이 1월 4일이었다. 그 뒤의 어떤 추위도 그때 추위만 하지는 않았다고 말씀하셨다. 오늘도 많이 춥겠지만 우리 민족이 겪은 1951년 연초의 추위만 같지는 않을 것이다.
해방 후 원산의 작가동맹에서 펴낸 동인지 『응향(凝香)』은 시인의 운명을 완전히 바꿔놓는다. 동인지에 실린 「밤」「여명도」「길」 등 구상의 시가 특히 사회주의 국가 건설의 희망을 노래하지 않고 퇴폐적이며 반동적이라고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으로부터 비판을 받고 인민재판까지 받을 지경에 이르자 목숨의 위험을 느껴 단신 월남한다.
월남 이후 구상은 언론계에 투신하였고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종군작가단에 참가하였다. 신부가 된 작은형은 전쟁 전에 공산군에 끌려가서 행방불명이 되고 북에 남은 어머니는 전쟁 중에 아사하는 가족사의 처참한 비극을 겪는다. 이데올로기 대립과 남북 분단에 따른 이런 일련의 비극 체험은 그의 시가 기독교신앙에 기반한 사랑과 인간에 대한 연민을 담은 휴머니즘을 전제로 하면서 전쟁의 비극을 초극하려는 의지가 엿보이게 하는 데 크나큰 작용을 한다.
[구상(1919〜2004) 시인]
영남일보 주필과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대우교수, 하와이대학교 교수를 역임했다. 기독교적 구원 의식을 바탕으로 인간 존재와 우주의 의미를 탐구했다. 동서양의 철학이나 종교에 조예가 깊어 존재론적이고 형이상학적 인식에 기반한 독보적인 시 세계를 이룩했다. 현대사의 고비마다 강렬한 역사의식으로 사회 현실에 문필로 대응, 남과 북에서 필화를 입고 옥고를 치르면서까지 지조를 지켜 온 현대 한국의 대표적인 전인적 지성이다.
이승하 시인,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시집 『우리들의 유토피아』『욥의 슬픔을 아시나요』『생명에서 물건으로』『나무 앞에서의 기도』『생애를 낭송하다』『예수ㆍ폭력』『사람 사막』 등
평전 『윤동주-청춘의 별을 헤다』『최초의 신부 김대건』『마지막 선비 최익현』『진정한 자유인 공초 오상순』
지훈상, 시와시학상, 편운상, 가톨릭문학상, 유심작품상, 서울시문화상 등 수상
코리아아트뉴스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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