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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화 화백, 단색화의 거장 93세로 별세

KAN 편집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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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단색화의 거장 정상화 화백이 94세의 생을 28일 마감했다. 그는 평생을 격자형 추상회화에 바치며 독창적인 예술 세계를 구축했고, 국내외 미술계에 깊은 영향을 남겼다.


예술적 시작과 격자 회화의 탄생


1932년 경상북도 영덕에서 태어난 정상화 화백은 인천사범학교 미술교사로 임용되며 미술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의 대표작인 격자형 추상회화는 1967년 브라질 상파울루 비엔날레 출품을 위해 방문한 현지에서 영감을 얻어 탄생했다. 당시 인부들이 돌을 네모나게 잘라 길을 만드는 모습을 보고, 그는 어린 시절 어머니가 한복을 지으며 천에 주름을 잡고, 밥을 지으며 도마 위 무를 가지런히 자르던 기억과 연결지었다. 이 경험은 그에게 격자형 회화의 원형을 제공했다.

'단색조 추상화' 대가 정상화 화백 별세…향년 93세
고 정상화 화백 [사진: 갤러리현대]


일본에서의 예술적 도약


1960년대 후반 일본 고베로 건너간 그는 1970년대 초반에 본격적으로 격자 회화 양식을 확립했다. 초기에는 그의 작품이 ‘벽지 그림’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그의 진가를 알아본 이들도 있었다. 미술가 이우환은 "세계 어디를 다녀도 이런 장인 정신을 갖고 이렇게 어려운 작업을 하는 작가는 보지 못했다"며 그의 작품을 높이 평가했다. 한 일본 평론가는 그의 작품 속 흰색을 두고 "정상화의 흰색은 무지개"라고 표현하며, 멀리서 보면 같은 흰색 같지만 가까이서 보면 다양한 색이 보이는 오묘한 빛깔을 지녔다고 설명했다.


예술 철학과 작업 방식


정상화 화백은 작품 하나를 완성하는 데 6개월에서 1년의 시간을 들이며, 온몸을 써서 체중을 실어 작업했다. 체력 소모가 큰 작업이었기에 나이가 들수록 더욱 어려워졌지만, 그는 흔들림 없이 자신의 길을 걸었다. 2023년 갤러리현대에서 열린 개인전에서 그는 기자들과 만나 "그렇게 똑같은 일을 반복하는 게 참 바보스럽죠. 하지만 그 자체가 제 작품입니다. 사람이 사는 것도 결국 반복입니다. 다르게 보면 격자를 구획한 선은 내 실핏줄이고, 작품은 곧 내 심장이 뛰고 철렁대는 모습이지요"라고 말했다.

정상화 Chung Sanghwa ,Untitled 82-11, 1982 , Acrylic on canvas, 158 x 123 cm  [PART]

시장의 재평가와 국제적 인정


그의 작품은 2000년대 초중반까지만 해도 수백만 원대에 거래되었지만, 이후 급등하여 현재는 수억 원에서 십수억 원에 거래되고 있다. 그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2021년 개인전을 열었으며, 한국 현대미술을 상징하는 작가로 자리매김했다. 

2023년 스위스 큐레이터 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저는 그림 그리는 화가로서 하고 싶은 것은 다 했어요. 그런데 한편으로는 지금 이 순간에도 '조금 더 잘해야 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들어요. 인간의 생각에는 만족이란 있을 수 없거든요. 그러니 완성이란 것도 있을 수 없어요. 작가의 일은 하나의 세계관을 만들어내는 거니까요. 그래서 예술이란 끝없는 것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끝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끝없는 것을 한다는 것"이라고 밝혔다.

 

고 정상화 화백의 빈소는 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 6호실에 마련되었으며, 발인은 1월 30일이다. 그의 예술은 끝났지만, 그가 남긴 격자 속 세계는 여전히 살아 숨 쉬며 후대의 예술가들에게 깊은 영감을 줄 것이다.

 

KAN 편집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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