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희의 수필향기] 은행나무 - 김영희
은행나무
김영희
그 넉넉한 품이 가끔씩 그립다. 그 세월이 1,100년이라니, 누가 그 앞에서 숙연해지지 않을 수 있을까.
거북의 발을 닮은 거칠고 굵은 나무 발이 우람차게 땅을 딛고 서 있다. 뿌리에서 뻗어 올라간 나무 기둥이 하나의 기둥 속에서 굵은 물길을 여러 개 뚫으며 굵직굵직한 나뭇가지를 들어 올렸다.
은행나무의 삶은, 봄이면 연둣빛 나뭇잎을 애면글면 키워서 여름이면 진초록으로 성장시키고, 가을이면 동그란 열매를 매달고 황금빛 나뭇잎으로 온 세상 가득 환하게 밝히다가, 겨울이면 누렇게 마른 잎을 바람에 맡겨 하나도 남김없이 다 떨구고, 굵은 몸통만 덩그러니 남은 채 혹독한 겨울을 견딘다. 새봄에 새롭게 태어날 새싹을 틔우기 위해, 자식들 다 키워서 시집 장가 보내고 남은 텅 빈 둥지처럼 그렇게 남겨진다. 뼈대만 남은 몸으로 다시 올 봄을 기다린다.
용문사 은행나무는 해마다 그 일을 새롭게 시작하며 계속 반복해왔다. 그 시간이 1,100년이라니, 누가 그 앞에서 숙연해지지 않을 수 있을까. 쌀쌀한 겨울 바람이 약해지며 순풍이 불어올 때 숨죽이고 있던 나무들은 깊은 땅속에서 부지런히 물을 길어 올린다. 줄기 끝까지 물을 보내기 위해 추위에 바짝 오그렸던 가지를 쭉 펴고, 햇살이 내리쬐는 가지마다 연둣빛 싹을 틔우느라 여념이 없다.
가지에 막 틔운 새싹은 햇살을 받으며 뿌리의 그 깊은 마음을 헤아려 여기저기에서 나팔을 불듯 새싹 잔치를 벌인다. 나뭇가지에 돋은 어린 싹이 어느새 바람결 따라 반갑게 손을 흔든다. 가지에 피어난 작은 새싹들은 따사로운 태양빛을 온 몸에 받으며 살포시 제 살을 찌운다. 그렇게 우리의 봄은 시작되고 곧 꽃소식이 사방에서 손짓할 거다.
가을이 되면 길바닥에 지천으로 떨어져 나뒹구는 동글동글한 은행들. 옛날에는 귀하게 여겨 은행나무 아래에 떨어진 은행을 주우러 손에 장갑을 끼고, 은행을 집게로 집어 봉지 속에 넣는 사람들도 자주 보았는데, 요즘은 가져가는 사람도 없고 무심히 밟혀 짓이겨진 모습에, 아깝게도 쓸모를 잃은 은행을 바라보는 내 속이 새까맣게 탄다. 기침과 천식에 좋아서 은행을 프라이팬에 구워 하루에 몇 알씩 먹었는데, 이제 파는 곳도 보기 힘들어 요즘 아이들은 은행의 약효를 모르기 십상이다.
은행銀杏은, '은 은銀'자와 '살구 행杏'자가 합쳐져 '은빛 살구' 라는 뜻으로, 표면이 흰가루로 덮여있고 은행나무 씨가 노랗게 익으면 살구와 비슷하게 생겼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맑은 우윳빛 은행 껍질을 깨면 연둣빛 알맹이가 나오는데, 그 젤리처럼 말랑말랑한 알맹이는 열매가 아니라 씨앗이다. 많은 식물들은 씨앗이 다치지 않고 잘 번식하도록 딱딱한 껍질 속에 씨앗을 보관하여, 생명의 강인함과 존귀함을 소중히 지키고 있다.
씨앗을 품은 은행은 제 몸에 겨워 땅에 떨어지고, 지나가는 무수히 많은 발걸음에 짓눌러져, 제 속을 다 드러내고 고약한 냄새를 풍긴다. 씨앗을 지키기 위해 '내 씨앗을 건드리지 마라' 라며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은행이 무슨 잘못이 있을까.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은행나무를 가로수로 심지 말아야 한다는 말도 하지만, 가을을 샛노랗게 물들이며 우리에게 '밝은 희망(노란 등불)'을 안겨주는 나무가 은행나무 말고 또 뭐가 있으랴. 가을 날 햇살에 사위어가는 노란 은행잎이 쌓인 길을 걷는 운치는 또 어디서 느낄 수 있단 말인가.
자연은 그대로 두어야 자생력이 강해지고 인간에게도 이롭다.
양평 용문산 자락의 용문사 대웅전 앞에 서 있는 그 은행나무를 보러 가겠다고 수차례 마음먹었다. 용문사 가는 길은 주차장에서 걸어 올라가기도 부담되지 않을 만큼 적당한 거리에, 넓게 잘 정리되어 있어서 편안하게 다가왔다. 일주문을 지나고 해탈교를 건너 산길을 따라 올라가 은행나무 앞에 섰다.
대웅전으로 올라가는 계단 앞에 서 있는 1,100년의 역사를 간직한 그 은행나무. 하늘을 향해 높이 뻗어 오른 굵은 세 줄기를, 듬직한 은행나무 밑동이 그 무게를 온전히 견디며 가지들을 튼실하게 키우고, 나뭇가지마다 춤추듯 하늘을 향해 자유롭게 뻗어있다.
나뭇가지 하나가 보통 나무 한 그루의 기둥이 될 만큼 굵어 오랜 세월을 버티고 견뎌 왔음을 말해준다. 그 긴 세월을 견디고 서있는 용문사 은행나무 앞에 서니 한없이 작고 보잘것없는 나 자신을 보게 되어 머리가 절로 숙여졌다.
용문사 은행나무에서는 일제강점기 때 혼란스러웠던 시대의 아픔이 느껴진다. 거국적인 의병 항일전을 위해 스님들이 의병을 일으켜 지켜냈다는 이야기 때문인지, 그 은행나무에는 남성적인 강인한 용맹함이 깃들어있다. 힘들었던 시기를 함께 보고 겪어서일까. 그 아픔의 시간을 견뎌오며 강인한 정신이 그대로 은행나무에 각인되었으리라. 힘차고 자유로운 기상!
나무에게 겨울은, 비바람에 꺾이고 거센 눈보라에 가지가 부러지면서 몸통에 남아있는 상처를 더 이상 감출 수 없는 텅 빔의 시간이다. 나무는 추운 겨울을 버텨내기 위해서 가지의 잎을 모두 떨구고 최소한의 빈 몸으로 황량하게 서있다.
나무는 그 힘들었을 세월 동안 혹독한 겨울을 묵묵히 버티면서 순한 봄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제 할 일을 잊지 않고 또다시 새싹을 틔워 제가 죽지 않고 살아있음을 증명한다. 그렇게 나무가 다시 활기차게 살아갈 일 년의 시간이 시작된다.
사람은 백 년을 살기도 힘든 것을 나무는 천 년을 넘게 사니 자연 앞에서 인간은 한낱 작은 미물, 지나가는 나그네가 아닌가. 그래서 여러 전설에 싸여있는 용문사 은행나무가 더 신비로워 보인다.
용문사 은행나무는 동양에서 현존하는 나무 중에 가장 오랜 세월을 견뎌냈다. 긴 세월을 견뎌낸 상징처럼 줄기 아래쪽에 혹 같은 큰 돌기가 있고, 생물학적 자료로서 가치가 높아 천연기념물로 지정, 보호되며 우리 곁을 늘 지켜주고 있다.
그 곧고 굵은 나무 기둥은 흔들리지 않을 속 깊고 듬직한 나무임을 고백한다. 그 은행나무를 보고 있으면 형언할 수 없는 신비한 힘에 빠져 묵언의 기도를 하게 된다.
내가 무언가에 지쳐있을 때, 삶이 빛바랜 낙엽처럼 느껴질 때, 가끔 찾아보고 싶은 용문사 은행나무는 내 삶에 든든하게 진정한 버팀목이 되어준다.
1,100년의 세월을 품은 그 은행나무가 초라한 나의 모습을 말없이 반겨주고, 다독여주고, 다시 해보라고 힘을 내어준다. 돌아 나오며 또 다음을 약속한다. 모든 이에게 힘이 되어줄 용문사 은행나무가 건실하기를 기원한다.
길바닥에 떨어진 은행을 잘 거둬서 은행나무의 고귀함을 지켜주고 싶다.
올 한해도 충실하게 살아낼 그 은행나무의 넉넉한 품이 가끔씩 그리워 용문사로의 여행을 꿈꾸곤 한다.
길바닥에 떨어진 노란 은행잎을 주워 책갈피에 끼우며 한 해의 추억을 간직한다.
천 년 세월 품은 용문사 은행나무가 내년에 또 싱싱한 싹을 틔워 우리 곁을 환하게 지켜주기를 기원하며.

[심향 단상]
여행의 목적과 방향은 다양합니다.
누구나 마음 속에 자신만의 '가고 싶은 곳' '머무르고 싶은 곳'이 있을 것입니다. 그곳에 오래 머무르지 않아도 잠시 들러 그곳의 풍경을 보고 그곳 사람들과 시간을 함께 하는 방문은 참으로 소중하여 기억 한 편에 늘 남아있습니다.
현실의 막막함을 잠시 내려놓고 싶을 때, 슬픈 일로 울적한 마음을 가눌 수 없어 어디로든 떠나 쉬고 싶을 때, 혼란한 상황에 빠져 마음이 답답하고 머릿속이 정리되지 않을 때 또는 미지의 새로운 곳에 대한 기대로, 우리는 현실에서 벗어나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어집니다.
'훌쩍 떠남'은 문제를 피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해결을 잠시 미뤄두고, 다른 좋은 생각이 있는지 다시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질 수도 있고, 현재의 기분을 조금 누그러뜨리고 새로운 것을 보고 느끼며 기분 전환을 할 수도 있고, 낯선 곳으로 떠나 그곳 사람들 속에서 예기치 않은 일들을 겪으며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가족이 함께 가는 여행, 친구와 떠나는 여행, 나 홀로 가는 여행 또는 친목 단체에서 함께 가는 여행 등 누구와 가는가의 문제도 있습니다.
각자 떠나지만 여행지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그곳을 특별히 경험하고 싶어서 찾아왔고, 다른 사연으로 한 곳에 모여 같은 곳을 돌아보는 사람들은, 잠시 하나의 공동체가 되어 짧은 시간이지만 함께 하며 순간 순간의 기쁨을 같이 누리게 됩니다.
혼자일 때 느끼는 즐거움이 있고, 함께할 때 느끼는 즐거움도 있으니 모두 소중한 추억 보따리가 될 것입니다.
용문사는 제가 가끔 찾아가고 싶은 곳 중 한 곳입니다. 은행나무를 찾아가며 산길을 오르고 오래된 다리를 건너며 맑은 공기를 마시고, 시원한 계곡 물소리를 들으면서 갈 수 있어서 몸과 마음이 시원해짐을 느낍니다. 용문사 은행나무가 주는 용기와 격려와 위로는 누구에게나 필요할 것입니다. 어느 계절에 가도 그 계절만의 운치가 있어 좋습니다.
이러한 모든 여행은, '나를 찾기 위한 여행'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에게는 내가 가장 소중한 존재이므로, 내가 원하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 많은 선택을 해야 함에 있어서 그 선택의 옳고 그름을 따져보고, 선택 앞에서 어느 쪽이 바람직한가를 고민하며 내가 앞으로 가야 할 길을 다시 찾아보기도 합니다.
모든 것은 나에게서, 나로 인해, 나를 위한 여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바로 서있어야 세상도 바로 볼 수 있고, 다른 사람도 바로 설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우선 내가 똑바로 서서 좌우를 살펴 보는 여유를 가져야겠습니다.
이 세상은 나 혼자 살 수 없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 곳입니다.
서로 발을 맞추며 마음을 맞추고 생각도 맞추며 살아간다면 많은 사람들이 행복한 사회가 될 것입니다.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 한 마음 한 마음 맞추며, 가을이 되면 노란 은행잎이 떨어져 쌓인 은행나무 길을 걸어보세요.
김영희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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