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하의 하루에 시 한 편을 263] 김효연의 "동생이 나타났다"
동생이 나타났다
김효연
밀양역에서 여동생이 나타났다
까무잡잡한 얼굴에 노랗게 물들인 긴 생머리를 질끈 묶어
낡은 트렁크 두 개가 먼저 들들 굴러오고
짧은 치마는 뒤에서 발랄하게 걸어온다
천 가방 서너 개가 손잡이에 매달려
까불까불 열차 통로로 들어올 때
단칸방 한 살림이 오는 줄 알았다
내 옆자리에 털썩,
시큼쿰쿰 하다못해 비릿한 이 풋내는
대뜸 “언니이 애뻐요오”
졸지에 주름살 언니 귀가 달아오른다
이십여 년 전
앙코르와트에서 기념품을 든 맨발의 소녀가
졸졸 따라오며
“언니, 언니 예쁘다” 발음도 정확하던
밥 같은 그 말이 여태 살아서
여기까지 데려오다니
석 달 동안 비닐하우스에서 깻잎만 따다가
눈에서 코에서 들깨 순이 파릇 돋아나
깻잎 이불은 다정하지 않고 이슬만 매달아
새 일자리 찾아가는 캄보디아 처녀
분홍 매니큐어가 벗겨진 손톱 군데군데
초록이 번져 어느 별나라에서 온 듯
“어디로 가?”
“수원 친구 있어. 나 근로자.”
근로자란 말끝에 매달린 심정이 언어 장벽만큼 아슬하다
지쳐 고단해 보이는 가방들만 없었다면
관광 온 듯 밝고 명랑한 저 목소리
딸보다 어려 보이는
그녀 손바닥에 내 손을 포개면
금방 퍼런 물이 스밀 것 같은
싱그럽다가 알싸하다가
내 어깨에 기대 점점
가슴으로 왼쪽 뺨을 갖다 대는 앳된 동생
조심스레 창문 햇빛 가리개를 내릴 때
기차는 구미역을 통과한다
―『꽃과 숟가락』(파란, 2025)

[해설]
한국에 와 있는 외국인 근로자
이 시는 부산발 서울행 기차를 탄 화자의 옆에 밀양에서 탄 젊은 여성과 동행하면서 겪은 짧은 이야기를 정리한 것이다. 젊은 여성, 즉 아가씨는 캄보디아인으로 석 달 동안 비닐하우스에서 깻잎만 따다가 그 생활을 접고 수원으로 가는 중이다. 붙임성이 아주 좋다. 옆에 앉은 화자를 보곤 “언니이 애뻐요오”라고 말하고 관광 온 듯 밝고 명랑한 목소리로 종알댄다.
그런데 “어디로 가?”라는 화자의 질문에 “수원 친구 있어. 나 근로자.”라고 답한다. 친구가 소개한 일자리를 찾아서 가는 중이다. 분홍 매니큐어가 벗겨진 손톱 군데군데 초록이 번져 있고 웬 보따리가 그리 많은지 낡은 트렁크 두 개 외에도 천 가방이 서너 개 더 있다. 한 살림을 옮기고 있는 중이다. 화자는 딸보다 어려 보이는 그녀를 왜 동생이라고 한 것일까? 혈육의 정을 느낀 것일 수도 있고 예전에 공장에서 일한 동생이 생각나서일 수도 있다.
우리도 산업화의 기치를 높이 올리고 내달았던 시절에 서울 구로공단, 반월 공업단지, 구미 전자공업단지, 울산 석유화학단지, 마산 자유무역지역, 포항종합제철, 거제 조선소, 옥포 조선소 등이 세워지면서 많은 노동 인력이 필요했다. 지금은 전국 각 지역의 공장지대에 가보면 외국인 노동자가 정말 많다. 예전에 개그 프로에 나온 블랑카(스리랑카에서 왔다고 하지만 한국인 정철규)가 ‘뭡니까 이게, 사장님 나빠요’ 하고 불만을 토로했는데 태곳적 얘기다. 하지만 한국인 노동자와 동등한 대우는 받지 못할 것이다.
캄보디아인 아가씨는 이윽고 잠이 든다. 화자의 어깨에 기대고 점점 가슴 쪽으로 왼쪽 뺨을 갖다 댄다. 화자가 조심스레 창문 햇빛 가리개를 내릴 때 기차는 구미역을 통과한다. 이 아가씨, 수원에서는 무슨 일을 할까? 착실히 돈을 모아 귀국해 가게라도 하나 차리면 좋겠다. 우리나라에 와 있는 외국인 노동자가 점점 늘어나 어느덧 300만, 이제는 국내 각종 산업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농촌에서 어느 작물 수확의 때가 되었을 때, 외국인 노동자가 없으면 수확할 수가 없다고 한다. 더불어 사는 시대, 그들이 분노의 눈물을 흘리게 해서는 안 된다.
[김효원 시인]
2006년 《시와 반시》로 등단했다. 시집 『구름의 진보적 성향』『무서운 이순 씨』『꽃과 숟가락』을 냈다.
이승하 시인,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시집 『우리들의 유토피아』『욥의 슬픔을 아시나요』『생명에서 물건으로』『나무 앞에서의 기도』『생애를 낭송하다』『예수ㆍ폭력』『사람 사막』 등
평전 『윤동주-청춘의 별을 헤다』『최초의 신부 김대건』『마지막 선비 최익현』『진정한 자유인 공초 오상순』
지훈상, 시와시학상, 편운상, 가톨릭문학상, 유심작품상, 서울시문화상 등 수상
코리아아트뉴스 전문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