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강호의 시조 아카데미 51] 우은숙의“시래기의 힘”
시래기의 힘
우은숙
행여, 기죽지 마라
환절기 몸살이다
맨 처음 네 입술이
세상 향해 삐죽일 때
성급히
너를 잊고자 흰 눈을 기다렸다
그 겨울 오고
곤궁해진 오후 2시
행여 기죽지 마라
너는 새로 태어난다
뜨겁게
몸 던진 순간 함박눈이 내린다
대붕의 날갯짓으로
세계를 받치던 힘
이제는 실직 앞에
허공 품는 시래기지만
절대로
기죽지 마라
당신은 아 • 버 • 지 • 다

이 시조 「시래기의 힘」은 ‘시래기’라는 소박한 대상을 통해 삶의 고단함과 그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존엄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시 전반에 반복되는 “기죽지 마라”라는 당부는 단순한 위로를 넘어, 삶을 버티게 하는 근원적 명령으로 작용하며 서사의 흐름을 단단히 붙든다.
첫 수에서 “환절기 몸살이다”라는 표현은 현재의 고통을 일시적인 상태로 환치한다. 이는 삶의 고난이 본질이 아니라 지나가는 과정임을 암시한다. 이어 “세상 향해 삐죽일 때”의 ‘입술’은 존재의 시작과 의지의 표출을 상징하지만, 곧 “흰 눈을 기다렸다”는 구절에서 자기 부정의 정서가 드러난다. 여기서 ‘흰 눈’은 모든 것을 덮어버리고 싶은 망각의 욕망이며, 삶의 초입에서 이미 흔들리는 인간 내면을 섬세하게 보여준다.
둘째 수에서는 “곤궁해진 오후 2시”라는 시간적 배경을 통해 지쳐가는 시기를 드러낸다. 그러나 다시 “너는 새로 태어난다”는 선언이 이어지며, 존재의 가능성을 열어둔다. 특히 “몸 던진 순간 함박눈이 내린다”는 표현은 희생의 극점에서 오히려 정화와 회복이 시작된다는 역설로 읽힌다. 이때의 눈은 더 이상 망각이 아니라 치유의 상징으로 변모한다.
셋째 수에서 ‘시래기’는 작품의 핵심으로 자리 잡는다. 한때 “세계를 받치던 힘”을 지녔던 존재가 이제는 “허공 품는 시래기”로 전락한 모습은, 사회적 역할을 잃은 개인의 현실을 반영한다. 시래기는 버려질 뻔했으나 다시 쓰이는 존재로, 좌절 속에서도 생의 가능성을 품고 있는 인간을 비유한다.
종장의 “당신은 아 • 버 • 지 • 다”라는 선언은 이 모든 서사와 상징을 하나로 응축한다. ‘아버지’는 희생과 책임의 이름이며, 쉽게 무너질 수 없는 존재의 근거다. 결국 이 시는 가장 낮은 자리에서도 끝내 기죽지 않는 삶의 힘을, 절제된 언어로 설득력 있게 그려내고 있다.
김강호 시인

1960년 전북 진안 생
199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조집 『당신 생각 소나기로 쏟아지는 날』외 다수
2024년 44회 가람문학상 수상
고등학교 1학년 교과서 「초생달」 수록
코리아아트뉴스 전문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