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강호의 시조 아카데미 34] 김강호의 “아라홍련”
아라홍련
김강호
고려하늘 끌어당겨
연잎으로 펼쳐놓고
목을 길게 뽑아 올린 아라가야 꽃봉오리
칠백년 깊은 잠에서 이제 막 깨는구나.
칠흑 같은 어둠 속에 묻었던 사랑의 불씨
기어이 꺼지지 않고 이쯤에 인연이 닿아
그렁한 꿈결 더듬어 눈물겹게 피는구나.
살아서 다 하지 못할 짧은 우리 사랑
알알이 잘 여문 씨앗으로 묻어 놓아
천년 뒤 아니, 만년 뒤
이렇듯, 이렇듯이...

‘깊은 시간을 건너 다시 피어나는 사랑의 기억
— 아라홍련의 역사적 영혼과 내면의 부활’
나는 오래전, 잿빛 고려의 하늘 아래 살던 사람들의 꿈을 오늘의 햇살로 불러들이고 싶었다. 흙 속에 파묻힌 씨앗이 시간을 밀어내며 싹을 틔우듯, 인간의 기억 또한 진흙과도 같은 세월을 뚫고 되살아난다는 사실을 아라홍련이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먼저 고려의 하늘을 연잎처럼 끌어내 펼쳐놓았다. 그 하늘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무너지고 흩어지고 또 다시 세워졌던 한 민족의 숨결이었다. 그 위에 목을 길게 뽑아 올린 아라가야의 연꽃은, 사라진 나라의 기품이면서 동시에 한 연인의 기다림 같은 것이었다. 칠백 년을 묵묵히 견디어온 그 봉오리는 그리움이 얼마나 오래 숨을 참을 수 있는지, 그리고 얼마나 오랫동안 잊힌 채로도 피어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작은 기적이었다.
어둠은 언제나 침묵을 동반한다. 나는 시 속 두 번째 연을 쓰며 그 어둠 속에 파묻힌 ‘사랑의 불씨’를 떠올렸다. 역사는 늘 승자의 기록으로 남지만, 진짜 인간의 기억은 패자의 눈물, 혹은 이름 없이 사라진 이들의 꿈에서 피어난다. 칠흑 같은 밤 속에서도 완전히 꺼지지 못한 그 불씨는, 왕국의 멸망을 보았을지도 모를 어느 연인의 속울음이자, 나라를 잃고 흩어진 백성들의 체념과 체온이었다. 그러나 불씨는 꺼지지 않았다. 마침내 이 시점, 이 시대에 이르러 다시 ‘인연이 닿아’ 되살아났다. 나는 그 되살아남을 단순한 개화가 아니라, 긴 꿈결을 더듬어 찾아온 회귀로 보았다. 눈물겹도록 피어나는 연꽃은 과거의 사랑이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시간을 건너온 영혼의 흔적이라는 사실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장 아프게 표현하고 싶었던 구절은 “살아서 다 하지 못할 짧은 우리 사랑”이었다. 이 구절은 단지 두 사람의 비극적 사랑이 아니라, 존재하는 모든 인간관계와 모든 시대의 슬픔을 내포한다. 우리는 살아 있는 동안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채 남겨두는 일이 많다. 나라와 나라 사이의 단절, 시대와 시대 사이의 단층, 부모와 자식의 거리, 연인 사이의 부재와 같은 것들. 그래서 나는 이 미완의 사랑을 씨앗으로 남겨 묻어두는 표현을 선택했다. 씨앗을 묻는다는 것은 포기가 아니라 희망의 다른 얼굴이며, 시간에게 맡기는 기도의 형식이다. 씨앗은 썩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알알이 여문’ 무게를 품고 있다가 어느 순간 또 다른 생명으로 피어난다.
그 피어남이 ‘천년 뒤 아니, 만년 뒤’라 해도 좋다. 시간은 인간에게 잔혹하지만, 동시에 가장 공정한 치유자이기도 하다. 지금은 닿지 못한 마음들이라도, 언젠가 시간이 충분히 숙성되면 다시금 꽃으로 피어난다. 나는 이 마지막 구절을 쓰며, 한 시대가 완성하지 못한 사랑 또한 훗날 다시 이어질 수 있다는 믿음을 담았다. 인간의 사랑, 역사의 상처, 잊힌 이름들, 그리고 삼켜진 감정들은 모두 연꽃의 씨앗처럼 남아, 언젠가 다른 시대의 햇살 속에서 되살아난다.
결국 아라홍련은 한 송이 연꽃이 아니라, 시간을 이겨낸 기억의 증거이며, 영혼이 다시 피어나는 방식에 대한 상징이다. 그 꽃이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은, 역사도 사랑처럼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아라홍련은 죽은 것이 아니라, 오래 잠들어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지금 눈앞의 한 송이는, 우리가 잊어버린 사랑과 우리가 잃어버린 시간들이 다시 우리를 찾아오는 방식이다. 그 부활의 순간을 시로 기록함으로써, 나는 우리가 살면서 해내지 못한 마음의 숙제를 아주 느리게, 그러나 아름답게 풀어보고자 했다.
김강호 시인

1960년 전북 진안 생
199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조집 『당신 생각 소나기로 쏟아지는 날』외 다수
2024년 44회 가람문학상 수상
고등학교 1학년 교과서 「초생달」 수록
코리아아트뉴스 전문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