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o
[시 해설] 이영희의 "바다를 품은 냉장고"
문학/출판/인문
[ 이승하의 하루에 시 한 편을 ]

[시 해설] 이영희의 "바다를 품은 냉장고"

이승하 시인
입력
수정
[ 이승하의 하루에 시 한 편을 138]

 

바다를 품은 냉장고

 

이영희

 

풍어(豐漁) 때가 되면 배가 은빛 바다를 토해낸다

등푸른 생선 반짝이는 은빛 냉동 모드로 달래며

냉장고는 검푸른 바다를 꿈꾼다

소프트웨어 프로그램된 바다로 거슬러 올라가

파도 소리, 깊고 푸른 바다를 종횡무진할 생선의

메모리칩에 내장된 비밀 코드를 해독하는 데 성공했다

바다를 통째로 삼키고 꼬리지느러미를

마지막으로 복원 중이다

바다를 품어 만삭이 된 냉장고는 상상임신 중이다

 

―『글여울 문학』(2024년 제4호)

 

바다를 품은 냉장고
바다를 품은 냉장고 [ 이미지:류우강 기자]

   [해설]

 

   새로운 감각, 새로운 상상력

 

  근년에 이렇게 신선한 감각의 시를 읽은 적이 없다. 냉장고가 “바다를 통째로 삼키고 꼬리지느러미를/ 마지막으로 복원 중이다”란 구절은 인간의 상상력이 무한대(∞)로 뻗어갈 수 있음을 입증한 놀라운 시, 기상천외한 시구다.

 

  이 시에서는 영판 다른 이미지가 상충한다. 이미지의 파동과 굴절이 종횡무진 파노라마처럼 전개된다. 배[船]와 은빛 바다, 냉장고와 검푸른 바다는 완전히 다른 이미지다. 기계문명과 자연 그 자체를 대비한 것도 그렇지만 “소프트웨어 프로그램된 바다”와 “생선의/ 메모리칩에 내장된 비밀 코드를 해독하는 데 성공”했다는 두 구절은 21세기인 지금,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던 우리가 기계에 종속되어 살게 된 딱딱하고 무미건조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기계문명이라는 것은 자연을 파괴해놓은 그 폐허 위에 세운 것이다. 돌고래의 떼죽음은 바다의 오염도 문제지만 바닷속까지 파헤치는 통신의 발달 때문이다. 잠수함들이 돌아다니면서 온갖 전자장비를 사용하고 있으니 돌고래들이 혼란스러워 정신착란의 상태가 된 것이다. 그래서 결국 “바다를 품어 만삭이 된 냉장고는 상상임신 중이다”라는 결론에 다다르게 된다. 가정에는 냉장고, 세탁기, 정수기, 공기청정기, 청소기 등이 작동하고 있다. 생선도 먼 조상은 바다에서 즐겁게 놀았는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양어장에서 사육된다. 그것들은 냉장고 안에서 깡깡 언 상태로 장기 보관된다. 냉장고가 바다를 품고 있다는 역설적인 표현이 설득력을 지니게 된 것이다. 북극해와 남극대륙이 사라지고 있으니 인간도 이제 지구라는 냉장고에 들어갈지 모른다. 또 한 번의 빙하기를 맞아서.

 

  [이영희 시인]

 

  경북 의성에서 출생. 《문학저널》(시)과 《재미한국인 수필문학》으로 등단. 경희대 해외동포문학상, 한미에피포드 예술문학상 수상. 현재 미국 애틀랜타 순수문학회 회원.
 

이승하 시인,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시집 『우리들의 유토피아』『욥의 슬픔을 아시나요』『생명에서 물건으로』『나무 앞에서의 기도』『생애를 낭송하다』『예수ㆍ폭력』『사람 사막』 등

 

평전 『청춘의 별을 헤다-윤동주』『최초의 신부 김대건』『마지막 선비 최익현』『진정한 자유인 공초 오상순』

 

지훈상시와시학상편운상가톨릭문학상유심작품상서울시문화상 등 수상

 

코리아아트뉴스 전문위원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email protected]

share-band
밴드
URL복사
#이영희시인#바다를품은냉장고#시해설#좋은시읽기#이승하시인#좋은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