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해설] 최명숙의 " 나, 당신을 이제"
나, 당신을 이제
최명숙
푸른 빛 도는 숲길에서
당신은 나를 바라보고 있음에
내가 보는 당신의 눈에는 미소가 있었고
앞으로 넘어야 하는 험한 산의 지도가 그려져 있었어요
짐작할 수 없는 내일의 길,
예기치 않은 어려움을 아는 것
당신은 그저 바라봄으로
그래도 가야 할 나의 길을 알려주시는 거겠지요
가는 길목마다 서 계시는 이,
그런 당신입니다
나도 이제 당신을 봅니다
내가 오랫동안 기다린 당신
영원한 삶, 바른 길로 가는 믿음입니다
아침 해 뜨는 바다에서
당신은 나를 기다리고 있음에
나를 맞는 당신의 손에는 나침판이 들려있고
건너야 하는 거친 바다의 닻을 올리고 있었어요
언제 올지 모를 폭풍의 속, 갑자기 덮친 혼돈을
준비하는 것
당신은 그저 기다림으로
저리 건너야 할 내 삶의 닻을 조여주시는 거겠지요
바다 가운데서 길잡이 돼주시는 이,
그게 당신입니다
나도 이제 당신을 기다립니다
내가 찾아 헤맨 당신
끝없는 생의 바다를 건너는 평화입니다
―『심검당 살구꽃』(도서출판 도반, 2021)

[해설] 사랑의 실천, 사랑의 탐구
이 시를 쓴 최명숙 시인은 2000년 구상솟대문학상을 수상한 분으로 뇌병변장애가 심합니다. 하지만 뵐 때마다 얼마나 싹싹하고 씩씩한지, 내심 탄복하면서 절로 고개를 떨구게 됩니다. 이 시집을 낸 출판사의 편집주간이고 ‘보리수아래’의 대표지요. 보리수아래가 뭐냐구요? 장애인들이 모여 문화예술활동을 하고 불교의 자비와 수행을 실천하는 비영리 모임으로 최 시인이 350명의 회원을 이끌고 있습니다. 해마다 외국의 장애인들과 교류하면서 공동시집도 내고 회원들의 사화집도 내면서 장애인들의 유대를 위해 노력하고 있는 걸로 압니다.
대한불교조계종의 포교사이니 이 시를 쓸 때 최명숙 시인은 ‘당신’을 부처님이라고 생각하고 썼을 것입니다. 하지만 세속의 저는 이 시의 화자를 저로 삼고 당신을 미지의 누군가로 설정하고 싶습니다. 한용운이 그랬듯이 ‘님’은 연인일 수도 있고 조국일 수도 있고 부처일 수도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이 시의 당신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오랫동안 기다린 당신”은 “영원한 삶, 바른 길로 가는 믿음”이 아니겠습니까. 사랑은 바로 믿음이지요.
성경에서도 바다는 아주 중요한 상징으로 묘사되곤 합니다. 이 시에서도 당신은 “건너야 하는 거친 바다의 닻을 올리고” 있고 “바다 가운데서 길잡이 돼주고” 있습니다. 당신이 지금까지 나를 기다려주었지만 이제부터는 내가 당신을 기다릴 거라고요? 내가 찾아 헤맨 당신은 “끝없는 생의 바다를 건너는 평화”라고 했습니다. 아아, 절묘한 결구입니다. 사랑은 바로 평화지요.
이 나라 대학 중 ‘사랑의 실천’을 교훈으로 삼은 학교가 어디인지 아시는지요? 첫 시집의 제목을 ‘사랑의 탐구’로 삼은 시인을 아시는지요? 형이 꾸지람을 좀 한다고 칼로 찔러 살해하고 부모 두 분까지 살해한 사건 보도를 저녁에 접하고 미칠 것만 같아서 최명숙 시인의 시집을 읽고 있습니다. 구상솟대문학상 수상작 「난을 위한 노래」는 이렇게 끝나지요.
한 생의 기쁨은
숱한 인연의 고해를 건넌 후에야
한결같은 마음으로 보듬어진 보람으로
마침내 새살이 돋아 피어났구나.
[최명숙 시인]
1962년 10월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났다. 의료환경이 열악한 시골에서 구삭동이 조산과 난산으로 태어났기에 그 과정에서 뇌병변장애를 갖게 되었다. 한국뇌성마비복지회에서 25년 근무하였고, 현재는 장애인의 모임 보리수아래 대표, 도서출판 도반의 편집주간으로 있다.
1992년 《시와 비평》 신인상을 받은 이후 2002년 구상솟대문학상, 2018년 대한민국장애인문화예술대상 국무총리상을 수상했다. 2021년 시집 『심검당 살구꽃』이 한국불교출판협회의 올해의 10대 불서로 선정되었다. 시집 『인연 밖에서 보다』『마음이 마음에게』『산수유 노란 숲길을 가다』『버리지 않아도 소유한 것들은 절로 떠난다』 등이 있다.
이승하 시인,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시집 『우리들의 유토피아』『욥의 슬픔을 아시나요』『생명에서 물건으로』『나무 앞에서의 기도』『생애를 낭송하다』『예수ㆍ폭력』『사람 사막』 등
평전 『청춘의 별을 헤다-윤동주』『최초의 신부 김대건』『마지막 선비 최익현』『진정한 자유인 공초 오상순』
지훈상, 시와시학상, 편운상, 가톨릭문학상, 유심작품상, 서울시문화상 등 수상
코리아아트뉴스 전문위원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