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하의 하루에 시 한 편을 212] 박경화의 "대지의 눈"
대지의 눈*
박경화
1
시간을 되감아도 갈 수 없는 길이 있네
통곡의 벽을 넘어 날지 못한 기억의 터
죽어도 감지 못한 눈, 가랑잎이 덮어주네
2
이제 눈 감으세요, 남은 이의 몫이에요
한 생을 패대기친 미친바람 잊지 않고
먹물 진 당신의 가슴 우리가 닦을게요
*서울 남산 ‘기억의 터’에 있는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한 조형물
―『금강 억새』(목언예원, 2024)

[해설]
누가 누구를 위안한단 말인가
박경화 시조시인의 이 작품을 보고 가슴이 먹먹해진다.
그래,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지였지. 일본이 일으킨 전쟁의 피해자는 일본 군복을 입고 참전한 징병(徵兵)만이 아니었지. 탄광으로, 도로건설현장으로, 벌목장으로 끌려간 수십만 징용(徵用) 인력은 노임도 받지 못했고 환자인 경우 치료도 받지 못했지. 수천 명 젊은 여성은 전장으로 끌려가 매춘을 강요받았지.
시인은 서울 남산 ‘기억의 터’에 있는 조형물 ‘대지의 눈’을 보고 이 작품을 썼을 텐데, 지금은 이 조형물이 철거되고 없다. 작품 설치 자체의 취지는 좋았는데 불미스런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서울시장은 2023년 9월 5일, 임옥상 화백이 1심에서 유죄 판결을 받자 그가 서울시에 설치한 작품을 철거하였다.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작가의 작품을 유지ㆍ보존하는 것은 공공미술의 취지와 부합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다. 이 시조는 그 사건과는 무관하고, 위안부 할머니의 넋을 달래고 한을 위로하기 위해 쓴 것이다.
위안부(慰安婦)라는 용어 자체가 치욕이다. ‘일본군을 위안하는 부녀자’라니 말이 안 된다. 중국과 동남아에서 전쟁 중인 군인들 사이에 성병이 퍼지자(강간에 의한 성병이다) 이를 방지하고 전투력 증강을 위해 일본군 수뇌부는 병영 막사에서 집단으로 성욕을 처리할 방안을 모색해 식민지의 젊은 여성들을 취업 사기로 모집해 끌고 갔다. 오랜 세월 일본은 그 사실을 부정하였고, 부정했으니 당연히 보상을 회피하였다.
박경화 시인은 말한다. 더 이상 괴로워하지 마시라고. 그대의 한 생을 패대기친 광풍을 우리가 잊지 않고, 먹물 진 당신의 가슴을 우리가 닦을 테니 이제 편히 눈을 감으시라고.
대지의 눈에는 247명의 명단이 적혀 있었는데 사실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다. 일본은 국제회의 석상에서 줄기차게 “일본 정부가 발견한 자료 중에는 군이나 관헌에 의한 이른바 ‘강제연행’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20만 명이라는 숫자도 구체적 증거가 없는 숫자다.” “‘성노예’라는 식의 표현은 사실에 반한다.”라는 주장을 하는데 이에 동조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있어서 가슴이 더욱 아프다. 그리고 남산 기억의 터에 지금은 과거를 되새기며 교훈으로 삼자는 취지로 만든 조형물 ‘대지의 눈’이 없다. 포클레인으로 다 파괴해 버렸다.
할머니들에게 가야 할 돈을 빼돌린 이도 있었다. 정의기억연대(정의연) 후원금을 횡령한 혐의를 받은 윤미향 전 의원에게 대법원에서 유죄를 선고했다. 대법원은 사기, 업무상 횡령 등의 혐의로 기소된 윤 전 의원에게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한 원심판결을 확정했다고 한다. 도대체 왜 우리가 죄없이 끌려가 죽을 고생을 한 할머니들을 괴롭힌단 말인가.
[박경화 시인]
경북 경주 출생. 2007년 《문학시대》 신인상에 시가, 2016년 《시조21》 신인상에 시조가 당선되어 등단. 한국시조시인협회 공모전 장원, 백수문학상 신인상 수상. 시집 『채석강, 독백』, 시조집 『허공에 기대다』『금강 억새』 간행. 대구문화재단, 경북문화재단, 한국예술인복지재단 창작지원금 수혜.
이승하 시인,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시집 『우리들의 유토피아』『욥의 슬픔을 아시나요』『생명에서 물건으로』『나무 앞에서의 기도』『생애를 낭송하다』『예수ㆍ폭력』『사람 사막』 등
평전 『청춘의 별을 헤다-윤동주』『최초의 신부 김대건』『마지막 선비 최익현』『진정한 자유인 공초 오상순』
지훈상, 시와시학상, 편운상, 가톨릭문학상, 유심작품상, 서울시문화상 등 수상
코리아아트뉴스 전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