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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강호의 시조 아카데미 65] 오종문의 “서늘한 유묵”

시인 김강호 기자
입력
“인간이 스스로의 삶을 끝없이 성찰할 때 마주하게 되는 존재의 온도”

 서늘한 유묵遺墨

​오종문

 

하루치 짧은 봄빛 잠시 세내 걷는 외길

제 뼈를 세운 고택 멈칫멈칫 들어설 때

기둥에 붙들려 사는

유묵들이 가득했다

 

필생을 다스려온 필적이 주는 속말

마음에 티끌만큼 사악함이 없었는가*

뿌리째 도굴된 내면

빈 통처럼 고요했다

 

저 오랜 문장 닮은 한 일가의 높은 품격

청빈한 바람 몇 점 놓아두고 돌아설 때

바닥난 허기진 슬픔

그늘이 더 서늘했다

 

*사무사思無邪 : 논어 위정편

서늘한 유묵 _ 오종문 시인 [ 사진 : 예산 추사 고택]

오종문의 시조 「서늘한 유묵」은 한 고택에 남겨진 유묵遺墨을 바라보는 체험을 통해 인간의 삶과 정신, 그리고 도덕적 성찰을 깊이 탐구한 작품이다. 시인은 단순히 오래된 글씨를 감상하는 데 머물지 않고, 유묵 속에 스며 있는 한 인간의 생애와 정신을 오늘의 삶으로 불러낸다.

 

첫 수의 "하루치 짧은 봄빛 잠시 세내 걷는 외길"은 인생을 하루의 봄빛에 빗댄다. 봄빛은 생명의 충만함을 뜻하지만, '하루치 짧은'이라는 표현은 그 생명이 얼마나 덧없고 유한한가를 동시에 드러낸다. 또한 '외길'은 고택으로 향하는 실제 길이면서, 누구도 대신 걸어줄 수 없는 삶의 여정을 뜻하는 표현이다. 그 길 끝에서 만나는 "제 뼈를 세운 고택" 역시 집을 인간의 육체에 빗댄다. 고택은 단순한 건물이 아니라 한 가문의 정신과 역사가 뼈대를 이루고 서 있는 생명체처럼 형상화된다. 이어지는 "기둥에 붙들려 사는 유묵"에서는 유묵이 살아 있는 존재처럼 묘사된다. 세월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고 기둥에 기대어 살아가는 글씨는, 육신은 사라져도 정신은 남는다는 사실이다.

 

둘째 수에서는 유묵이 화자에게 말을 거는 존재로 변한다. "필생을 다스려온 필적이 주는 속말"은 글씨가 침묵 속에서 인간의 양심을 깨운다. 이어지는 "마음에 티끌만큼 사악함이 없었는가"는 『논어』의 "사무사(思無邪)"를 인용하여 인간이 끝내 도달해야 할 도덕적 이상을 제시한다. 그러나 화자는 곧 "뿌리째 도굴된 내면"을 마주한다. 이 표현은 내면이 훼손된 현대인의 정신세계를 보여 주는 강렬함이다. 뿌리가 뽑힌 존재는 더 이상 생명의 근원을 유지할 수 없으며, 정신적 토대를 잃은 인간 역시 그러하다. 이어지는 "빈 통처럼 고요했다"는 고요가 평안이 아니라 공허를 뜻하는 중의성을 지닌다. 침묵은 깨달음의 결과일 수도 있지만, 이 작품에서는 스스로를 돌아본 끝에 남은 허무와 부끄러움의 침묵으로 읽힌다.

 

마지막 수는 작품의 철학적 정점이다. "저 오랜 문장 닮은 한 일가의 높은 품격"에서 문장은 글이면서 동시에 삶의 문장(文章)과 인간의 품격을 이루는 문양이라는 의미를 품고 있다. 또한 "청빈한 바람 몇 점"은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적 유산을 형상화한 상징이다. 바람은 잡을 수도 소유할 수도 없지만, 가장 오래 남아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가치다. 결국 화자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한 채 돌아선다. 그러나 마지막의 "바닥난 허기진 슬픔, 그늘이 더 서늘했다"는 단순한 감상이 아니다. 허기는 물질의 결핍이 아니라 참된 삶을 닮지 못한 정신의 결핍이며, 서늘한 그늘은 죽음의 그림자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향한 성찰이 만들어 낸 양심의 온도이다. 이 서늘함은 독자에게도 스스로의 삶을 되묻게 하는 윤리적 울림으로 확장된다.

 

결국 「서늘한 유묵」은 오래된 글씨를 감상하는 작품이 아니라, 유묵을 거울삼아 자신의 내면을 비춰 보는 성찰의 시조이다. 유묵은 한 인간의 삶을 넘어 시대를 견디는 정신이며, 고택은 전통과 인격, 살아 움직이는 필적은 진실을 말하는 양심이다. 또한 작품 곳곳의 삶과 죽음, 글과 인격, 침묵과 깨달음을 하나의 의미망으로 엮어 낸다. 시인이 느낀 '서늘함'은 차가운 감정이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의 삶을 끝없이 성찰할 때 비로소 마주하게 되는 존재의 온도다. 따라서 이 작품은 과거의 유묵을 읽는 시가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마음에 티끌만큼 사악함이 없었는가"를 묻는 철학적 성찰의 시조라 할 수 있다.

김강호 시인 

김강호 시인

1960년 전북 진안 생 

199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조집 『당신 생각 소나기로 쏟아지는 날』외 다수

2024년 44회 가람문학상 수상 

고등학교 1학년 교과서 「초생달」 수록

코리아아트뉴스 전문기자

시인 김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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