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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해설] 김수원의 "비가 내리는 날엔"
문학/출판/인문
[ 이승하의 하루에 시 한 편을 ]

[시 해설] 김수원의 "비가 내리는 날엔"

이승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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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하의 하루에 시 한 편을 102]

비가 내리는 날엔

 

김수원

 

비가 억수같이 내리는 날엔 기차를 탑시다

낮은 기압은 동동주와 어울리고요

목적 없는 날씨니까요

서울역에서 열차를 타면 목포역까지

빗물은 창가로 몸을 던지죠

다음 역은 없다는 듯

목포 가는 길에 지구를 몇 바퀴 돌아올 수도 있지요

밤나무가 밤을 떨어뜨리는 길에서

산사나무가 산사열매를 떨어뜨리는 길에서

내리지 마세요

종착역에 도착하면 바닷가 선술집을 찾아 들어가

동동주를 마시세요

기분이 동동 뜨라고 동동주래요

폭우가 쏟아지고 바람이 몹시 부는 날엔 당신도 동동 뜨세요

동동 떠서 기차를 탔다가 내렸다가 취했다가 깼다가

그래도 동동주로 채워지지 않는 무엇이 있어요

잔을 내려놓듯 아무 역에나 나를 내려놓고 싶은 날 있어요

지구를 몇 바퀴 도세요 대구나 목포도 좋지요

다음 역에 내려요 동동주를 마셔요

비가 비틀거리는 날엔

 

—『나는 아직 넘치지 않았다』(불교문예, 2025)에서

 

  

"비가 내리는 날엔" [이미지: 류우강 기자]

 [해설

 

  술을 사랑하는 참된 술꾼의 노래

 

  두보의 시를 보면 건강이 허락하지 않아 술을 못 마시게 된 것을 애달파하는 내용이 종종 나온다. 두보의 인생살이에 있어 가장 큰 즐거움이 음주였다는 것을 시를 보면 알 수 있다. 두보 같은 애주가가 지구상에 얼마나 많았을까. 술을 예찬한 시만 모아도 도서관을 메울 수 있을 것이다. 동양의 제천의식과 서양의 디오니소스 축제 때 제기(祭器)는 없으면 안 되는 물품이었고 술은 없으면 안 되는 준비물이었다. 미국의 웬 미친 사람들이 금주법을 만들었기에 마피아 같은 갱단이 음지에서 주류사업에 뛰어들 수 있었다. 당국을 대신해 술을 관리하면서 갱들은 돈방석에 앉았다. 술의 제조와 판매를 법으로 금하다니!

 

  김수원 시인이 애주가인지 모르겠는데 술을 간혹 한잔하는지? 술을 좋아하는 사람의 심리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비가 오면 술꾼들은 이상하게도 술을 마시고 싶어 환장한다. 시인은 우리에게 비가 내리면 기차를 타라고 한다. 기차를 타고 가다가 종착역에 도착하면 바닷가 선술집을 찾아 들어가 동동주를 마시라고 한다. 당연히 마셔야 한다. 기분이 동동 뜨도록.

 

  애주가보다 더욱 단수가 높은 사람을 호주가라고 부르는가? 호주가보다 훨씬 알코올 의존도가 높은 사람은 술꾼이나 술고래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격식을 갖춘 술자리가 아니라면 술은 친구 간의, 연인 간의 사이에 놓여 있던 허물을 벗어버리게 한다. 비가 비틀거리는데 집에 일찍 들어간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친구들한테 전화를 돌려라. 술집 이름을 대고 미리 가 있어야 한다. 기분이 동동 뜨라고 동동주라 한다는 것을 이 시를 통해 알게 되었다. “폭우가 쏟아지고 바람이 몹시 부는 날엔 당신도 동동 뜨세요라고 시인이 말했으니 우리는 그 말씀을 받들어야 한다. 적당한 음주는 생활의 활력소가 될 수 있으므로 우리 오늘은 가볍게 한잔!

 

  [김수원 시인]

 

  강원도 영월 출생.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전문가과정 수료. 2017년 《불교문예》로 시 등단. 2019년 《한국시조문학》으로 시조 등단. 시집 『바람의 순례』 『나는 아직 넘치지 않았다』 출간. 참여문학상, 계간문예 상상탐구 작가상, 숲속의 시인상 장원 수상.
 

이승하 시인,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이승하 시인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시집 『우리들의 유토피아』『욥의 슬픔을 아시나요』『생명에서 물건으로』『나무 앞에서의 기도』『생애를 낭송하다』『예수ㆍ폭력』『사람 사막』 등

 

평전 『청춘의 별을 헤다-윤동주』『최초의 신부 김대건』『마지막 선비 최익현』『진정한 자유인 공초 오상순』

 

지훈상시와시학상편운상가톨릭문학상유심작품상서울시문화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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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하시인#김수원시인#시해설#비가내리는날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