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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김혜영 시집 『가면의 감정』 출간… 가면의 틈에서 피어나는 애도의 언어

임만택 전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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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과 상실, 노동과 차별의 현실을 이미지로 변환한 김혜영 시인의 네 번째 시집 “몸의 기억이 진실에 더 가까운 거야”… 직접 말할 수 없는 감정에 새로운 얼굴을 입히다

사람은 살아가며 수많은 얼굴을 바꿔 쓴다. 괜찮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하고, 슬퍼도 웃으며, 견디기 어려운 순간에도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짓는다. 특히 삶의 가장 깊은 상처는 언제나 쉽게 말해지지 않는다. 감정은 숨겨지고, 침묵은 길어지며, 끝내 표현되지 못한 마음은 또 하나의 얼굴을 만들어 낸다.

[신간] 김혜영 시집 '가면의 감정' 표지

김혜영 시인의 네 번째 시집 『가면의 감정』은 바로 그 ‘말해지지 못한 감정의 얼굴’을 오래 들여다보는 시집이다.

 

1997년 《현대시》를 통해 등단한 이후 『거울은 천 개의 귀를 연다』, 『프로이트를 읽는 오전』, 『다정한 사물들』 등을 펴내며 독자적인 시 세계를 구축해 온 김혜영 시인이 신작 시집 『가면의 감정』을 청색종이 ‘청색지시선’ 20번째 시집으로 출간했다.

 

이번 시집에는 죽음과 상실, 전쟁과 폭력, 산업재해와 노동, 차별, 가족의 균열, 노년의 고독 등 우리 사회와 개인의 삶을 가로지르는 무거운 현실이 곳곳에 자리한다. 그러나 시인은 고통을 직접 고발하거나 감정을 격렬하게 토로하는 방식을 택하지 않는다. 대신 상처를 이미지와 장면 속으로 옮긴다.

 

현실에 존재하는 고통은 낙타와 외계인, 그림자와 천사, 수련과 오로라, 꽃과 나무 같은 또 다른 존재의 얼굴을 빌려 독자 앞에 나타난다. 시집의 제목인 ‘가면’은 바로 이러한 시적 세계를 관통하는 중요한 열쇠가 된다.

 

가면은 감정을 숨기기 위한 도구이면서 동시에 감정을 드러내는 또 하나의 얼굴이다. 감정노동자는 미소를 연기하고, 노동자는 고통을 견디며, 가족은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말하지 못한 갈등을 품는다. 남겨진 사람들은 슬픔을 삼키며 살아간다.

 

김혜영 시인은 이들이 쓰고 있는 가면 자체보다 그 틈에서 미세하게 새어 나오는 감정의 흔적에 시선을 둔다. 특히 이번 시집에서 돋보이는 것은 현실의 상처를 다른 이미지로 ‘변환’시키는 시적 상상력이다.

 

「수련의 이별」은 참혹한 사건 자체를 다시 재현하는 대신 죽은 아이가 오히려 부모를 위로하는 장면으로 슬픔을 옮겨 놓는다. 「떨어지는 사람」에서는 산업재해로 추락한 청년이 북극의 오로라가 되고, 「무지개가 뜬 봄날에」에서는 죽음을 앞둔 어머니가 분홍치마를 입은 천사의 모습으로 다시 등장한다.

 

현실의 고통은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다른 형상을 얻음으로써 더욱 오래 남는다.

 

시인은 고통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데 머물지 않고, 그것을 애도와 기억의 언어로 바꾸어 놓는다. 그래서 『가면의 감정』에서 죽음은 단순한 소멸을 뜻하지 않는다. 사라진 존재들은 수련과 별빛, 오로라와 바람, 천사의 모습으로 다시 돌아온다.

 

세월호 희생자와 산업재해 노동자, 병사들과 노년의 어머니처럼 시집 속에서 사라진 존재들은 다른 이름으로 다시 불린다. 그 이름을 부르는 행위는 곧 기억이며 애도다. 

 

시집 전반에 반복적으로 흐르는 또 하나의 정서는 ‘모성’이다. 군대에 간 아들을 걱정하는 어머니, 사춘기를 지나가는 아들을 바라보는 어머니, 늙은 어머니를 돌보는 딸의 모습이 여러 작품에 등장한다. 그러나 김혜영 시인의 모성은 단순히 혈연적 관계 안에 머물지 않는다.

 

시인의 시선은 노숙인과 취업에 실패한 청년, 비정규직 노동자, 산업재해 희생자, 감정노동자와 사회적 약자들에게까지 확장된다. 집을 잃은 고양이와 꿀벌, 당나귀, 그림자처럼 작고 낮은 존재들 역시 시의 중심으로 들어온다. 경쟁과 효율이 우선되는 세계에서 쉽게 밀려나는 존재들이다.

 

하지만 시인은 이들을 ‘패배한 존재’로 기록하지 않는다. 오히려 여전히 살아 있고, 여전히 아프며, 그렇기 때문에 더욱 기억되어야 할 존재로 불러낸다. 그 점에서 『가면의 감정』은 현실 비판의 시집이지만 분노만으로 이루어진 시집은 아니다. 그보다 연민과 애도의 시집에 가깝다.

 

시인 허연은 추천사를 통해 김혜영 시인의 세계를 “삶과 죽음, 우주와 부엌, 광장과 노을”을 함께 노래하는 시 세계로 바라본다. 빛과 어둠이 동시에 존재하듯 김혜영의 시 역시 아름다움과 고통, 삶과 죽음이 분리되지 않는 장소에서 시작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번 시집은 가장 개인적인 가족의 풍경에서부터 산업재해와 세월호, 노동과 전쟁, 사회적 폭력에 이르기까지 넓은 현실을 오간다. 그러나 거대한 담론보다 한 사람의 얼굴과 한 존재의 상처를 먼저 바라본다.

 

표지에 적힌 “몸의 기억이 진실에 더 가까운 거야 / 얼굴이 추상명사로 바뀌는 순간”이라는 문장은 이번 시집의 정서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얼굴이 사라지고 이름이 숫자나 사건, 통계로 바뀌는 순간 인간의 고통은 쉽게 추상화된다. 김혜영의 시는 그 반대 방향으로 움직인다. 사건 속에서 다시 얼굴을 찾아내고, 숫자 뒤에서 사람을 불러내며, 사회적 문제 속에 감춰진 한 사람의 몸과 기억을 되살린다.

 

시집은 4부로 구성됐다.

 

1부 ‘가장 아름다운 죄인’에는 「윤슬」, 「투명 가면」, 「빛의 혁명」, 「아들의 운동화」, 「극한 직업」, 「외계인 가족」, 「전일빌딩 245」, 「법의 여신, 디케는 잠들고」 등이 실렸다.

 

2부 ‘서로의 얼굴을 가만히 어루만지는’에는 「당나귀와 꽃」, 「봄의 정원」, 「꿀벌에게」, 「파란 장미와 전기자동차」, 「수련의 이별」 등이 수록됐다.

 

3부 ‘당신은 꽃피는 사과나무’에서는 「고유명사와 얼굴」, 「무지개가 뜬 봄날에」, 「사춘기를 기억하는 나무」, 「떨어지는 사람」, 「이별하는 방식」 등을 만날 수 있다.

 

4부 ‘바닷가 낡은 집을 비추는 햇살’에는 표제작 「가면의 감정」을 비롯해 「낙타가 눈을 껌벅이는데」, 「그림자의 표정」, 「행복에 이르는 확률」, 「오로라로 떠나는 여인들」, 「구룡포 해녀의 독백」, 「겨울 여행」 등이 실렸다.

 

말미에는 문학평론가 문혜원의 해설 「시 디톡스의 공간, 봄의 정원」이 수록돼 김혜영 시 세계를 보다 깊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한다.

 

김혜영 시인은 1997년 《현대시》로 등단했다. 시집 『거울은 천 개의 귀를 연다』, 『프로이트를 읽는 오전』, 『다정한 사물들』을 비롯해 평론집 『메두사의 거울』, 『분열된 주체와 무의식』, 산문집 『아나키스트의 애인』, 『천사를 만나는 비밀』, 『영미시의 매혹』 등을 펴냈다.

 

그의 시집은 미국, 중국, 일본에서도 출간됐으며 미국 iUniverse에서 『A Mirror Opens One Thousand Ears』, 중국 옌벤대학교 출판부에서 『镜子打开千双耳朵』, 일본 칸칸보 출판사에서 『あなにとぃぅ記号』 등이 출간됐다. 애지문학상을 수상했으며 현재 부산대학교 인문학연구소 연구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가면의 감정』에서 시인은 상처를 지우려고 하지 않는다. 슬픔을 성급히 치유하려 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사라진 존재가 남긴 빈자리를 오래 바라보고, 그곳에서 아직 말해지지 않은 감정의 표정을 찾아낸다.

 

그리고 시는 그 감정에 하나의 새로운 얼굴을 건넨다.

 

낙타가 되고, 수련이 되고, 오로라가 되고, 천사가 되는 순간이다.

 

그렇게 『가면의 감정』은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가 매일 마주치는 수많은 얼굴 가운데 얼마나 많은 얼굴이 자신의 진짜 감정을 감춘 채 살아가고 있는가. 그리고 우리는 그 가면의 작은 틈 사이로 새어 나오는 타인의 고통을 얼마나 오래 바라볼 수 있는가.

김혜영의 시는 그 질문 앞에서 조용히 머문다.

 

상실을 지우지 않으면서 기억으로 바꾸고, 현실의 상처를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절망만을 남기지 않는 것. 그것이 『가면의 감정』이 보여주는 애도의 방식이며, 시가 현실의 고통을 견뎌내는 또 하나의 방법이다.

도서 정보

도서명 『가면의 감정』
저자 김혜영
출간일 2026년 6월 22일
출판사 청색종이
총서 청색지시선 20
판형 118×184mm
쪽수 152쪽
제본 양장
정가 13,000원
ISBN 979-11-93509-37-1 03810

임만택 전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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