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해설] 장석남의 "아버지 옷"
[이승하의 하루에 시 한 편 21]
아버지 옷
장석남
다락방에서 아버지 옷을 입어보았다 아버지의
서른 살 혹은 마흔 몇 살의 어깨를 감쌌던
소매가, 어깨 끝이 닳았고 안감은 너덜거렸다
중학생에게 터무니없이 컸으나 나는
그 옷 속에서 안온하였다 내 속에도 소중한 무엇이 있는 듯했다
한 번쯤 그 옷을 걸치고 거리를 걸었던가?
아무도 알아보지 못할 감정을 데리고 대문을 나섰으나
골목 끝쯤에서 망설임에 패하여 돌아섰던가?
왼쪽 안주머니 앞에 수놓인 노란 아버지 한자(漢字) 이름이
심장에 닿아 따끔거렸는데 그것은 희미한 불씨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르지
옛적, 집 안에 숨겨 보존했다는 전설의 그 불씨 말이야
아들이 곧잘 내 서른 살의, 마흔 살의 옷을 걸치고
서둘러 현관을 나선다 쿵! 대문을 닫고 나간다
엉치 아래 내려오는, 소매 긴 옷을 입고
나는 알지 그 감정 자락을
아들이 눈 오는 저녁 거리로 나서는 날이면
나는 아득한 그 다락방으로 간다
함박눈이 쌓이는 그 다락방으로 가서
아버지 옷!
그래, 그 ‘아버지 옷’이라는 것이 있지
꽃이 꽃을 벗고
열매가 열매를 입듯이
아버지 옷
아버지 옷
―『내가 사랑한 거짓말』(창비, 2025)에서

[해설]
아버지의 옷을 입어볼 때의 기분
중학생 때 다락방에서 아버지의 옷을 입어보았던 경험이 이 시의 창작 동기다. 아버지가 서른 혹은 마흔 몇 살 때까지 입었던 낡은 옷을 입어봤던 것이 기억나는데 아들이 곧잘 내 서른 살의, 마흔 살의 옷을 걸치고 나간다면? 이런 것도 부전자전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아들의 그런 행동이 내 기억 속의 골동품을 하나 꺼내 들게 한다. 시간은 사람을 늙게 하고 병들게 하고 죽게 할 것이다. 이거야말로 인지상정이고 불변의 진리다. 아버지 자신 때가 되면 낡고, 아들이 낡고, 그의 아들이 낡을 것이다.
아버지의 옷을 입는다는 것은 아버지가 돼 보는 것이다. “왼쪽 안주머니 앞에 수놓인 노란 아버지 한자(漢字) 이름이/ 심장에 닿아 따끔거렸는데 그것은 희미한 불씨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르지”란 구절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예전에는 양복을 양복점에 가서 맞춰 입었다. 그래서 옷에 이름이 새겨져 있는 것이다. 아버지의 함자를 보게 되었는데 그것이 나의 심장을 따끔거리게 한다.
유행이 한참 지난 내 옷을 아들이 입고 나갔을 때, 나는 함박눈이 쌓이는 그 추억의 다락방에 가서 아버지의 옷을 입어본다. 아버지의 옷을 입어보았을 때의 착잡함을 장석남 시인만 느껴보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 경험을 시로 써본 이는 장석남 시인이 처음일 것이다. 이 시는 상상력의 산물이 아니라 직접 경험한 일이라 여겨진다. 아버지의 유품은 보통 태우게 되는데 태우지 않고 다락방 한구석에 처박혀 있던, 아버지가 서른 혹은 마흔 몇 살 때까지 입었던 낡은 옷을 입어보라. 꽃이 꽃을 벗고 열매가 열매를 입듯이 대물림이 이뤄지는 것이다. 아버지는 꽃이요 나는 열매일까? 내가 열매이고 아들이 꽃일까? 꽃들은 지면 열매가 남아 후일을 기약한다. 아버지의 옷은 바로 그것을 증언하는 증거품이다.
[장석남 시인]
1965년 인천 덕적도에서 출생하여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거쳐 인하대 대학원 국문과 박사과정을 수료한 후 현재 한양여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198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맨발로 걷기」가 당선되어 등단했으며 1991년 첫 시집 『새떼들에게로의 망명』으로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했고 1999년 「마당에 배를 매다」로 현대문학상을 수상했다. 장석남 시인의 시에는 그리움이 있다. 시간과 내력을 꿰뚫는 그의 시선 앞에서 사물들은 그 내면에 숨긴 고독을 드러내고 돌아갈 고향을 반추한다. 아름답고 섬세한 감성으로 많은 사랑을 받아온 신서정파 시인이다.
『새떼들에게로의 망명』, 『지금은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 『젖은 눈』, 『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 『미소는, 어디로 가시려는가』, 『뺨에 서쪽을 빛내다』, 『고요는 도망가지 말아라』, 『꽃 밟을 일을 근심하다』 등의 시집과 『물의 정거장』, 『물 긷는 소리』 등의 산문집이 있다.
이승하 시인,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시집 『우리들의 유토피아』 『욥의 슬픔을 아시나요』 『나무 앞에서의 기도』 『사람 사막』 등
평전 『마지막 선비 최익현』 『최초의 신부 김대건』 『진정한 자유인 공초 오상순』 등
지훈상, 시와시학상, 편운상, 가톨릭문학상, 유심작품상, 서울시문화상 등 수상
현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