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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모란 앞에서, 우리가 마음에 새긴 것

임만택 전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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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골 한옥마을에서 만난 봄의 한 장면

오늘 남산골 한옥마을에 다녀왔다. 봄볕이 한옥의 처마 끝에 부드럽게 내려앉고, 마당과 담장 사이로 푸른 잎들이 조용히 흔들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곳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한옥도, 돌담도, 고즈넉한 풍경도 아니었다. 모란이었다.

사진 기자 제공

남산골 한옥마을의 모란꽃은 생각보다 크고 탐스러웠다. 꽃잎은 겹겹이 포개져 있었고, 짙은 자주빛과 순백의 꽃송이는 봄날의 햇살을 온몸으로 받아내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면 향기도 은은했다. 화려하지만 요란하지 않고, 풍성하지만 가볍지 않은 꽃. 모란은 그렇게 제 모습을 다 펼쳐 보이고 있었다.

 

흥미로운 것은 그 꽃 앞에 모인 사람들이었다. 내국인보다 외국인들이 더 많아 보였다. 그들은 연신 카메라와 휴대폰을 들고 모란을 찍었다. 꽃 한 송이를 배경으로 서로를 찍어주고, 꽃잎을 가까이 들여다보고, 한옥의 담장과 모란이 함께 들어오는 장면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한국의 봄이 그들에게는 한 장의 그림처럼 다가온 듯했다.

사진 기자 제공

이곳의 모란은 어느 곳보다 많았다. 문득 강진의 김영랑 생가가 떠올랐다. 김영랑의 시 「모란이 피기까지는」을 떠올리면 자연스럽게 강진과 모란을 생각하게 되지만, 남산골 한옥마을의 모란 역시 그에 못지않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어쩌면 도심 한가운데서 만난 모란이라 더 특별했는지도 모른다. 빌딩과 거리의 소음에서 멀지 않은 곳에, 이렇게 고요하고 탐스러운 봄이 피어 있다는 사실이 새삼 놀라웠다.

모란 앞에 서니 자연스럽게 김영랑 시인의 시가 떠올랐다.

사진 기자 제공

김영랑, 「모란이 피기까지는」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 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사진 기자 제공

모란은 피어 있는 순간보다, 피기까지의 기다림과 진 뒤의 허전함을 더 크게 남기는 꽃이다. 김영랑 시인은 모란을 통해 봄의 찬란함만을 노래하지 않았다. 그는 찬란함 뒤에 찾아오는 상실, 아름다움이 사라진 자리에 남는 슬픔까지 함께 바라보았다. 그래서 그의 봄은 단순히 환한 계절이 아니라 “찬란한 슬픔의 봄”이다.

 

남산골 한옥마을의 모란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보았을까. 아마도 꽃만 본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활짝 핀 꽃잎 속에서 기다림의 시간을 보았고, 언젠가 떨어질 꽃잎을 생각하며 덧없음도 함께 보았을 것이다. 지금 눈앞에 있는 아름다움이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기에, 우리는 더 오래 바라보고 더 많이 사진을 찍는지도 모른다.

 

외국인들이 모란 앞에서 사진을 찍는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그들에게 모란은 낯선 나라에서 만난 아름다운 꽃이었겠지만, 우리에게 모란은 조금 더 깊은 정서를 건드린다. 한옥, 봄, 시, 기다림, 그리움, 그리고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아쉬움이 겹쳐진다. 모란은 단순한 꽃이 아니라 한국적 서정의 한 장면처럼 다가온다.

사진 기자 제공

모란꽃은 크고 화려하지만, 이상하게도 사람의 마음을 조용하게 만든다. 장미처럼 강렬하게 자신을 주장하지 않고, 벚꽃처럼 한꺼번에 흩날리며 계절을 몰고 가지도 않는다. 모란은 묵직하게 피었다가, 어느 날 문득 뚝뚝 떨어진다. 그래서 더 애틋하다. 피어 있는 동안에는 풍요롭고, 지고 나면 허전하다.

 

우리는 남산골 한옥마을의 모란 앞에서 봄의 절정을 보았다. 동시에 봄이 지나가고 있음을 느꼈다. 아름다운 것은 머물지 않고, 기다린 것은 언젠가 사라진다. 그러나 사라진다고 해서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사라지기 때문에 더 마음 깊이 새겨진다.

 

김영랑의 시가 오래도록 사랑받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는 모란을 통해 우리 모두가 겪는 기다림과 상실, 희망과 슬픔을 노래했다. 모란이 피기까지 우리는 기다리고, 모란이 지면 우리는 아쉬워한다. 그러나 다시 또 기다린다. 그 기다림 속에서 우리의 봄은 매년 새롭게 시작된다.

 

남산골 한옥마을을 나서며 다시 한 번 모란을 돌아보았다. 꽃은 여전히 햇살 속에 피어 있었고, 사람들은 그 앞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그 순간 문득 생각했다. 우리가 오늘 마음에 새긴 것은 모란꽃의 색깔만이 아니었다. 아름다운 것을 알아보는 마음, 사라질 것을 아쉬워하는 마음, 그리고 그럼에도 다시 기다리는 마음이었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우리는 아직 우리의 봄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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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만택 전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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