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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해설] 김수복의 "4행시 5편"
문학/출판/인문
[ 이승하의 하루에 시 한 편을 ]

[시 해설] 김수복의 "4행시 5편"

이승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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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하의 하루에 시 한 편을 96]

김수복 시인의 4행시 5

 

새벽길

 

울다가 웃다가 잠이 든 초승달아

커서 걸어가야 할 길 창창하다

해가 대문을 밀고 나와 눈인사를 보내니

산 넘어 마파람 소리 얼굴을 붉히는구나

 

비 갠 오후

 

한 잎 꽃을 내려놓는다

앞산 고요가 울음을 그치고

속웃음을 맑게 개니

뒷산이 더욱 달아올랐다

 

저녁 바다

 

북촌 계동 등불 켜지는 밀물의 바다

고래가 고래에게 말을 건다

입을 꼭 다무는 저녁의 골목

사람을 등에 업고 언덕을 올라간다

 

저녁의 배꼽

 

평생 걸어온 길 막다른 몸속

지는 해를 어디에 내려놓을까

새벽이 올 때까지

가슴 아래 담아 두어야겠다

 

자정에

 

해야, 해야 울다가 잠든 네 얼굴

새근새근 숨소리도 입술 다물었네

새끼노루도 발자국 소리 안고 가고

머리맡에 앉아 은하가 노래를 불러주네

 

—『저녁의 배꼽』(서정시학, 2025)

 

  [해설

  하루가 쌓여 일생이 된다

 

  김수복 시인이 최근에 낸 시집 『저녁의 배꼽』은 4행시만을 모은 시집이다. 단형시조는 3행이고 자수를 지켜야 하지만 4행시는 4행일 뿐 자수의 제약이 없다. 우리는 ‘4’라는 숫자에 참 익숙하다. 춘하추동, 기승전결, 사군자, 사천왕, 4악장……. 긴 시, 난해한 시, 산문시에 지친 독자들이 시에서 멀어지고 있는 이때 도서출판 서정시학과 계간 《서정시학》에서 펼치고 있는 4행시 운동은 이제 급물살을 타고서 디카시 운동과 더불어 구석에 몰린 우리 시단에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하고 있다.

 

  김수복 시인의 824행시 중에서 하루의 변화하는 시간대를 노래한 시들이 있어 그중 5편을 꼽아보았다. 「새벽길」은 울다가 웃다가 잠이 든 초승달아로 시작된다. 화자가 새벽길을 가다 만난 초승달, 이제 막 나타난 창백한 해, 마파람 소리가 다 의인화되어 있는 대단히 특이한 시다. 자연과 인간이 혼연일체가 되어 있다.

 

  「비 갠 오후」는 앞산과 뒷산이 비가 개어 호응하는 모습이 황홀하도록 아름답다. 차의 경적이 들려오는 아파트 4층에서 이런 시를 읽으니 선계(仙界)에 들어선 느낌이다. 「저녁 바다」는 선시(禪詩) 같다. 저 바다의 고래는 저녁이 되니까 뿌우뿌우 울면서 대화를 나누는 것만 같은데 사람들은 다 입을 다문다. 왜일까? 누군가 사람을 업고 언덕을 올라가고 있다. 업힌 사람은 어린아이일까 환자일까 연인일까. 언덕을 올라가면 저녁 바다가 보일 것이다.

 

  시집의 제목이 된 시의 그 저녁의 배꼽은 시간인지 공간인지 확인해야 한다. “평생 걸어온 길1975년 등단 이후 시인으로 살아온 50년을 가리킨 것이리라. 막다른 몸속 지는 해를 어디에 내려놓을까 고민하더니 새벽이 올 때까지/가슴 아래 담아 두어야겠다고 마음먹는다. 해를 가슴에 품고 잠들겠다는 뜻일 터, 시는 짧지만 엄청난 상상력으로 독자를 압도한다. 금방 자정이 된다.

 

  해가 울다가 잠이 들었다고 한다. 의인화된 해는 새근새근 숨소리도 입술 다물고 조용하다. 새끼노루도 발자국 소리를 안고 가는 자정 무렵에 은하가 내 머리맡에 앉아서 노래를 불러준다. 5편의 4행시를 보니 온 우주가 화자의 발밑에서 놀고, 화자는 그 우주를 장난감처럼 갖고 논다. 시는 다 짧지만 하루가 곧 우주의 역사이고 우주가 시인의 손바닥 안에 있다. 신이 우주를 창조한 것인지 시인이 우주를 창조한 것인지 모르겠다. 『저녁의 배꼽』을 읽으면서 4행시의 매력에 흠뻑 빠져보시기를.

 

 [김수복 시인]

 

  단국대 국문과, 동 대학원 문학박사. 단국대 문예창작과 교수, 단국대 총장 역임.

현 단국대 석좌교수. 한국시인협회 회장. 1975년 《한국문학》으로 등단. 시집 『지리산 타령』『낮에 나온 반달』『외박』『하늘 우체국』『밤하늘이 시를 쓰다』『슬픔이 환해지다』『고요공장』『의자의 봄날』 등. 편운문학상, 풀꽃문학상, 한국시인협회상, 김달진문학상 등 수상.
 

이승하 시인,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이승하 시인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시집 『우리들의 유토피아』『욥의 슬픔을 아시나요』『생명에서 물건으로』『나무 앞에서의 기도』『생애를 낭송하다』『예수ㆍ폭력』『사람 사막』 등

 

평전 『청춘의 별을 헤다-윤동주』『최초의 신부 김대건』『마지막 선비 최익현』『진정한 자유인 공초 오상순』

 

지훈상시와시학상편운상가톨릭문학상유심작품상서울시문화상 등 수상

 

코리아아트뉴스 전문위원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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