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규 칼럼] 인공지능시대, 예술은 몸으로 답한다
신체라는 가장 오래된 미래는 물리적 인공지능 시대, 예술과 인간의 실존, 몸의 언어가 기술의 언어와 만나는 자리
최근 무용과 공연예술 현장에서는 이전과 분명히 다른 언어가 오가고 있습니다. 수십 년간 몸으로 세계를 해석해 온 예술가들이 이제는 물리적 인공지능 체화된 인지, 자율 이족보행 감각 운동 통합과 같은 기술 용어를 자연스럽게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예술가들이 새로운 기술 트렌드에 관심을 보인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의 신체와 움직임, 감각과 창작의 문제가 기술의 언어로 재해석되기 시작했다는 신호이며, 역으로 기술의 언어가 예술의 질문을 필요로 하기 시작했다는 신호이기도 합니다.

오늘의 인공지능은 더 이상 화면 속 정보 처리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테슬라는 옵티머스를 위험하고 반복적이며 지루한 일을 수행할 수 있는 범용 이족보행 자율 인간형 로봇"으로 설명하며, 2025년 공장 내 배치를 시작했습니다. 보스턴다이내믹스의 아틀라스는 장애물을 넘고, 균형을 유지하며, 점프와 회전을 수행하는 전신 제어 능력을 실제 산업 현장에서 구현하는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중국의 유니트리는 G1 모델을 통해 저비용, 고기동 인간형 로봇 시장을 열었고, Figure AI는 BMW 생산라인에 로봇을 투입해 실제 제조 공정에서의 가능성을 검증했습니다. 즉, 인공지능은 이제 단지 계산하는 체계가 아니라, 실제 공간을 인식하고 균형을 잡으며 물리적 환경 안에서 스스로 행동하는 존재로 진화하고 있습니다.
이 변화가 예술가들에게 특별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명확합니다. 물리적 인공지능이 던지는 공학적 질문이, 무용과 퍼포먼스가 오랫동안 탐구해 온 철학적 질문과 정확히 겹쳐지기 때문입니다. 몸이란 무엇입니까. 움직임은 단순한 위치 변화입니까, 아니면 의미를 낳는 사건입니까. 인간이 신체를 가진다는 것은 단지 어떤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는 뜻입니까, 아니면 세계를 경험하고 관계 맺는 방식 전체를 뜻합니까. 기술은 지금 이 질문을 공학의 언어로 제기하고 있고, 예술은 다시 그 질문을 인간 실존의 자리로 되돌려 놓고 있습니다.
이 지점에서 다시 주목해야 할 개념이 바로 체화된 인지 입니다. 20세기 후반 인지과학과 철학은 인간의 사고를 뇌만의 독립적 작용으로 환원할 수 없다는 결론으로 수렴하기 시작했습니다. 철학자 모리스 메를로퐁티는 이미 1945년 지각의 현상학 에서, 근육과 뼈로 이루어진 객관적 신체와 우리가 세계를 살아가며 직접 경험하는 살아 있는 신체를 구분했습니다. 인간은 자기 몸을 바깥에서 관찰되는 물체로만 경험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몸을 통해 공간을 열고, 타인을 만나고, 세계를 느낍니다. 몸은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세계를 이해하는 출발점입니다.
이 관점은 최신 인지과학에서도 실증적으로 뒷받침되고 있습니다. 영국 왕립학회 학술지를 포함한 여러 연구들은, 인지가 뇌,신체,환경의 상호작용 속에서 형성된다고 보고합니다. 예컨대 사람들은 무거운 물건을 들고 있을 때 언덕을 더 가파르게 지각하고, 손으로 직접 물체를 조작할 때 그 구조를 더 깊이 이해합니다. 다시 말해, 인간의 생각은 몸과 분리된 순수한 정신 활동이 아니라 감각과 운동, 세계와의 물리적 접촉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이 체화된 인지 이론은 로봇공학과 인공지능 연구에도 직접적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실제로 오늘날 물리적 인공지능 개발자들이 직면한 가장 큰 난제는 역설적이게도, 인간 어린아이가 별다른 학습 없이 해내는 일들, 즉 불규칙한 지면을 걷는 것, 낯선 물체를 부드럽게 쥐는 것, 균형을 잃었을 때 즉각 회복하는 것입니다. 이를 공학 연구자들은 모라벡의 역설'이라 부릅니다. 고도의 추상적 계산은 기계가 인간보다 빠르지만, 감각과 운동이 통합된 물리적 작업에서는 인간 유아조차 현재의 로봇을 압도합니다. 이 역설이야말로 몸이 단순한 실행 장치가 아니라는 사실의 공학적 증거입니다.
로잔연방공과대학교 아트랩, 독일 카를스루에 예술미디어센터와 같은 기관들은 이미 과학적 연구와 예술적 연구를 함께 수행하는 공간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이 기관들이 공통적으로 주목하는 것은, 예술가가 신체와 움직임에 대해 축적해 온 지식이 기술 연구에 실질적 통찰을 제공한다는 사실입니다. 안무가와 무용수가 수십 년간 연구해 온 균형, 타이밍, 긴장과 이완의 역학은 로봇공학이 아직 완전히 풀지 못한 문제들과 정확히 맞닿아 있습니다.
기계가 움직일수록, 인간의 움직임은 무엇이 되는가, 그렇다면 이 상황은 예술과 인간의 신체에 어떤 전환을 요구합니까?
예술의 양극화가 더욱 뚜렷해질 것입니다. 인공지능은 이미 음악 작곡, 시각 이미지 생성, 안무 패턴 분석에서 광범위하게 활용되고 있습니다. 데이터 분석과 선호 예측에 기반한 상업 예술 영역에서는 인공지능과의 협업이 빠르게 확대될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고유한 경험과 해석, 존재의 질문을 끝까지 붙드는 순수 예술의 영역에서는 역설적으로 인간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가치가 더 선명해질 수 있습니다. 기술이 정교해질수록, 사람들은 단순히 "무엇이 잘 만들어졌는가"를 넘어 "그것이 어떤 삶과 어떤 감각에서 나왔는가"를 더 예민하게 묻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기술이 인간을 바라보는 기준의 변화입니다. 인간형 로봇이 점점 더 정교해질수록, 우리는 자칫 속도, 정확도, 일관성을 인간 신체의 새로운 표준으로 내면화할 위험에 처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몸은 본래 흔들리고, 지치고, 늙고, 아프며, 불균등합니다. 바로 그 불완전성 때문에 인간은 타인을 이해하고, 약함을 공감하며, 의미를 만들어 냅니다. 만약 기계의 정밀성이 인간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전환된다면, 노인과 장애인, 질환을 가진 사람, 느린 사람, 비정형적 몸을 가진 사람들은 더 쉽게 주변으로 밀려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윤리적 가설이 아니라, 이미 알고리즘 채용 심사와 의료 AI 편향 사례들을 통해 현실에서 확인되고 있는 구조적 위험입니다.
물리적 인공지능이 실제 공간에서 행동하는 체계인 만큼, 사고와 책임의 문제는 더욱 직접적입니다. 2023년 샌프란시스코에서 발생한 크루즈 자율주행 차량 사고에서, 미국 도로교통안전국은 보행자가 차량에 끌린 사후 상황이 초기 보고에서 누락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2024년 제재 조치를 발표했습니다. 유럽연합의 인공지능법(EU AI Act)은 2024년 8월 발효되어, 건강, 안전, 기본권에 미치는 위험을 기준으로 인공지능을 분류하고 규제하는 체계를 마련했습니다. 이는 기술을 억제하기 위한 장치가 아니라, 기술이 인간의 권리와 존엄을 침식하지 않도록 사회적 경계를 세우려는 시도입니다. 성능만큼이나 투명성, 책임성, 사후 보고의 문제가 물리적 인공지능의 핵심 규범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이제 기술 윤리를 넘어 법적·제도적 요구가 되었습니다.
인간의 창작은 효율만으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실패, 주저, 반복, 수정, 우회라는 비효율 속에서 더 깊어집니다. 인간의 몸이 손을 뻗는 행위는 단순한 관절의 이동이 아닙니다. 그것은 망설임일 수 있고, 애정일 수 있고, 두려움일 수 있으며, 오래된 기억에 반응하는 몸의 표현일 수 있습니다. 인공지능은 더 빠르게 계산하고 더 많은 경우를 조합할 수 있지만, 인간의 예술은 가장 빠른 답을 찾는 작업이 아닙니다. "왜 이 표현이 지금 나에게 불가피한가"를 끝까지 묻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예술 작품은 단순한 결과물이 아니라, 한 존재가 세계를 통과하며 남긴 시간의 기록이 됩니다.
무용과 신체예술이 물리적 인공지능 시대에 주변부가 아니라 담론의 중심이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로봇공학이 어떻게 더 자연스럽게 움직일 것인가"를 묻는다면, 예술은 이미 오래전부터 자연스러운 움직임이란 무엇인가" 의미 있는 몸짓이란 무엇인가" 하나의 동작은 왜 기억과 감정을 불러오는가"를 연구해 왔습니다. 과학이 몸을 이해하려 할수록, 예술이 축적해 온 신체의 지식은 오히려 더 중요해집니다.

물리적 인공지능 시대에 우리가 다시 붙들어야 할 것은 거창한 구호가 아니라 가장 구체적인 감각일지도 모릅니다. 직접 걷는 일, 천천히 읽는 일, 타인의 목소리 떨림을 듣는 일, 공연장과 전시장과 거리에서 몸으로 시간을 견디는 일. 이러한 행위들이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지키는 가장 근본적인 힘일 수 있습니다.
미래는 가장 새로운 기술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의미에서 미래는 가장 오래된 것, 곧 몸 안에 있습니다. 신체는 낡은 것이 아니라 아직 다 설명되지 않은 인간 지성의 현장이며, 예술은 그 몸을 통해 인간이 무엇인지를 끝까지 묻는 작업입니다. 기계가 점점 더 정교하게 움직이는 시대일수록, 우리는 더 진지하게 물어야 합니다.
잘 움직이는 것과 잘 살아내는 것은 과연 같은 일입니까.
그 질문을 놓지 않는 한, 예술은 여전히 인간의 가장 본질적인 미래일 것입니다.
조선규 | 칼럼니스트

35여 년간 교육과 기업 경영, 그리고 지역 사회 발전의 현장에서 사람과 함께 성장해왔다. “삶의 문제는 결국 사람의 문제”라는 믿음을 바탕으로 교육을 통해 변화를 만들고, 기업을 통해 길을 열었으며, 현재는 사회 곳곳의 다양한 문제를 함께 풀어가며 더 따뜻하고 공정한 미래를 그려가고 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