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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산의 책다락 13 ] 발자크의 『인간 희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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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산의 책다락 13 ] 발자크의 『인간 희극』

시인 남순대 기자
입력
사회의 모든 면모를 담아낸 거대한 파노라마

■책 소개
 

오노레 드 발자크(Honoré de Balzac, 1799-1850)의 『인간 희극』은 단순한 소설이 아니다. 이는 19세기 프랑스 사회 전체를 포괄하는 거대한 문학적 프로젝트로, 총 90여 편의 소설과 단편으로 구성된 연작 시리즈다.
 

발자크는 이 작품을 통해 "사회의 서기(書記)"가 되고자 했으며, 당시 프랑스 사회의 모든 계층과 직업, 인간 유형을 세밀하게 그려냈다.

오노레 드 발자크의 "인간 희극"은 19세기 프랑스 사회의 모든 면모를 담아낸 거대한 파노라마와 같다. 귀족부터 빈민까지, 야망으로 가득 찬 젊은이부터 세상에 지친 노인까지, 수많은 인물들이 욕망, 좌절, 사랑, 배신으로 얼룩진 드라마를 펼쳐낸다.
 

*전체 구조
『인간 희극』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1. 풍속 연구(Études de Mœurs)
사생활 정경: 『고리오 영감』, 『외제니 그랑데』, 『잃어버린 환상』 등
지방생활 정경: 『외제니 그랑데』, 『시골 의사』 등
파리 생활 정경: 『고리오 영감』, 『사촌 베트』 등


2. 철학적 연구(Études Philosophiques)
『샤그랭 가죽』, 『절대의 탐구』 등

3. 분석적 연구(Études Analytiques)
『결혼의 생리학』 등

■서 평
 

《인간 희극》(La Comédie humaine)은 오노레 드 발자크가 90편이 넘는 사실주의, 낭만주의, 환상소설 또는 철학소설 양식의 작품들ー소설, 단편, 콩트와 에세이ー을 묶은 총서의 제목이다. 이 작품을 통해 발자크는 후대에게 있어 참고 자료가 될, 그의 시대에 관한 광대한 프레스코화를 묘사하려는 목적으로 사회 집단와 사회의 톱니바퀴들의 체계적인 형태를 탐구하고자 “사회의 자연사”를 쓰고 싶어했다.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풍속 연구, 철학 연구와 분석 연구라는 세 개의 큰 집단으로 나눴다. 프랑스의 지방과 다양한 사회 계층들에 관하여 탐구 한 첫번째 연구는 가장 중요하며, 6개의 부분으로 다시 나뉜다. 이 작품들은 각기 다른 시절을 다루고 있는 여러 소설들 속에서 등장하는 수백명의 인물들에 의해 글로 서로 체계적으로 연결된다. 발자크는 작품의 통일성을 확실히 하기 위해, 145편 정도의 작품들을 전체적인 계획 속에 집어넣고자 하고자 자신의 수많은 작품들을 꾸준히 개작하며 수정했다.


현대 소설의 창시자로서, 발자크는 실재(réel)의 전체성을 묘사하고자 하며, 추하고 저속하다는 이유로 그 전까지 문학에서 무시당했던 현실성(réalités)에 관심을 보인다. 그는 여러 형태로 귀족의 해체와 사회적 유대의 소멸을 이끈 자본주의의 발흥과 돈의 전능함을 보여준다. 총서의 제목은 단테의 신곡에서 따왔다. 허나 신곡의 신학적인 계획과 달리 작가는 사회학자가 되고자 했고, 사랑과 우정이 큰 위치를 차지하며, 존재들의 복합성과, 부패한 은행가와 매수당한 정치가는 의기양양한 반면 약자는 굴복당하는 사회 체계의 심한 부도덕성이 조명되는, 반反마니교적(반이원론적)인 세계를 창조한다.
 

관찰력의 천재성을 갖고 태어난 발자크는 놀랍도록 진실된 인간 유형을 창조한다. 젊은 지방출신 야망가 라스티냐크, 집안의 폭군이자 구두쇠 그랑데 혹은 부성애의 상징 고리오 영감과 같은 그의 몇몇 인물들은 그런 성격을 가진 인물의 전형이 될 만큼 생생하다.

오노레 드 발자크 (Honoré de Balzac, 1799 ~ 1850)

●오노레 드 발자크 (Honoré de Balzac, 1799 ~ 1850)
 

프랑스의 작가. 투르에서 오노레 발자크(Honoré Balzac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소설가, 극작가, 문예 비평가, 수필가, 언론인, 인쇄업자로 활동했다. 발자크는 1829년부터 1855년까지 출간된 90편이 넘는 소설들을 하나의 작품으로 묶은 작품인 《인간 희극》을 남겼다. 그는 《100편의 해학 이야기》를 비롯하여 청년 시절에 필명으로 쓴 소설들과 25편의 완성되지 못한 작품들 역시 창작한 바 있다.

발자크는 프랑스 소설의 대가로 알려져 있다. 그는 《미지의 걸작》과 같은 철학적인 소재를 다룬 소설, 《나귀 가죽》과 같은 판타지 소설 등 다양한 장르의 소설을 썼다. 그는 특히 《고리오 영감》이나 《외제니 그랑데》에서 볼 수 있는 사실주의 문체에 두각을 보였다.
 

발자크는 자신이 인간 희극의 서문에서 설명했듯이 뷔퐁이 동물의 종을 식별했던 것처럼 당대 사회의 부류들을 식별하고자 했다. 소설이 '철학적인 가치'에 도달할 수 있다고 말한 월터 스콧의 소설을 읽음으로써 그는 많은 역사가들에게 잊혀진 역사와 그 사회에 관하여 서술하고 민중의 실제 모습과 소설을 겨루며 상이한 사회 계층과 그 사회를 이루는 개개인을 탐구하고자 했다.
 

작가는 자본주의의 대두와 새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귀족을 흡수한 부르주아지들을 묘사하고 있다. 숙명을 띤 존재에게서 인상을 받은 그는 자연이 창조한 것보다 더 많은 인물들을 창조해냈다 ”발자크가의 모든 것은 문까지도 천재적이다.” (보들레르)
 

정치에 관한 발자크의 견해는 일관되지 않은 애매한 면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왕당파로서 그는 7월 왕정에 대하여 강한 지지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반면, 이전에는 자신을 자유주의자라 칭한 적이 있다. 발자크가 쓴 소설에서 노동자들은 주요 등장 인물로는 나오지 않았지만, 발자크는 1840~1848년도 당시 이런 노동자들을 지지했다. 보수주의 이념을 지지하던 그는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인정한, 반면 어떤 면에 있어서는 무정부주의자와 반란자들이 관심을 보인 작품을 썼다.
 

문예 활동 이외에 그는 신문에 기사를 투고하고 훗날 파산하게 되는 두 개의 정기간행물을 성공적으로 편집했다. 작가의 고상한 사명을 확신하던, 사유에 의해 지배당하듯이 살았던 그는 저작권 보장을 위해 싸우고, 문인협회 설립에 이바지했다.
 

과로로 몸이 약해져 건강이 위태롭던 광적인 작업가였지만, 위험한 투자와 과소비로 인해 여러 거주지에서 가명을 쓰며 채권자들을 피해 살던 발자크. 그는 1850년, 그가 마음에 들어보이고자 17년간 노력한 한스카 공녀와의 결혼 전까지 많은 여성들과의 관계에 있었다. 그가 글을 써가며 번 돈은 부채를 갚기에 충분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그는 항상 인쇄업 같은 사업을 마음에 두었다. 포르튀네 로(rue Fortunée)에 위치한 궁전에서 그는 엄청난 사치 속에서 엄청난 부채를 안고 사망했다.
 

전 유럽에서 인정받고 읽힌 발자크의 소설은 당대와 후대의 작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귀스타브 플로베르는 소설 《감정교육》을 쓸 때 《골짜기의 백합》에서 영감을 받았다. 그뿐만이 아니라, 《보바리 부인》을 쓴 이는 쓸 때 《서른 살의 여인》에서 영감을 받았다. 광대한 양의 소설 속에서 변모하며 살아가는 등장인물들이 인간 희극 내 다른 작품에서도 등장한다는 점은 에밀 졸라와 마르셀 프루스트에게 큰 영감을 주기도 하였다. 이런 발자크의 작품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출판되고 있다. 《계모》는 1906년 영화화되었다. 이후에도 발자크의 수많은 작품들은 영화와 드라마 등으로 각색되며 전 세계에서 새로이 만들어졌다.

발자크는 프랑스 소설의 대가로 알려져 있다. 그는 《미지의 걸작》과 같은 철학적인 소재를 다룬 소설, 《나귀 가죽》과 같은 판타지 소설 등 다양한 장르의 소설을 썼다. 그는 특히 《고리오 영감》이나 《외제니 그랑데》에서 볼 수 있는 사실주의 문체에 두각을 보였다.
 

발자크는 자신이 인간 희극의 서문에서 설명했듯이 뷔퐁이 동물의 종을 식별했던 것처럼 당대 사회의 부류들을 식별하고자 했다. 소설이 '철학적인 가치'에 도달할 수 있다고 말한 월터 스콧의 소설을 읽음으로써 그는 많은 역사가들에게 잊혀진 역사와 그 사회에 관하여 서술하고 민중의 실제 모습과 소설을 겨루며 상이한 사회 계층과 그 사회를 이루는 개개인을 탐구하고자 했다.
 

작가는 자본주의의 대두와 새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귀족을 흡수한 부르주아지들을 묘사하고 있다. 숙명을 띤 존재에게서 인상을 받은 그는 자연이 창조한 것보다 더 많은 인물들을 창조해냈다 ”발자크가의 모든 것은 문까지도 천재적이다.” (보들레르)
 

정치에 관한 발자크의 견해는 일관되지 않은 애매한 면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왕당파로서 그는 7월 왕정에 대하여 강한 지지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반면, 이전에는 자신을 자유주의자라 칭한 적이 있다. 발자크가 쓴 소설에서 노동자들은 주요 등장 인물로는 나오지 않았지만, 발자크는 1840~1848년도 당시 이런 노동자들을 지지했다. 보수주의 이념을 지지하던 그는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인정한, 반면 어떤 면에 있어서는 무정부주의자와 반란자들이 관심을 보인 작품을 썼다.
 

문예 활동 이외에 그는 신문에 기사를 투고하고 훗날 파산하게 되는 두 개의 정기간행물을 성공적으로 편집했다. 작가의 고상한 사명을 확신하던, 사유에 의해 지배당하듯이 살았던 그는 저작권 보장을 위해 싸우고, 문인협회 설립에 이바지했다.
 

과로로 몸이 약해져 건강이 위태롭던 광적인 작업가였지만, 위험한 투자와 과소비로 인해 여러 거주지에서 가명을 쓰며 채권자들을 피해 살던 발자크. 그는 1850년, 그가 마음에 들어보이고자 17년간 노력한 한스카 공녀와의 결혼 전까지 많은 여성들과의 관계에 있었다. 그가 글을 써가며 번 돈은 부채를 갚기에 충분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그는 항상 인쇄업 같은 사업을 마음에 두었다. 포르튀네 로(rue Fortunée)에 위치한 궁전에서 그는 엄청난 사치 속에서 엄청난 부채를 안고 사망했다.
 

전 유럽에서 인정받고 읽힌 발자크의 소설은 당대와 후대의 작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귀스타브 플로베르는 소설 《감정교육》을 쓸 때 《골짜기의 백합》에서 영감을 받았다. 그뿐만이 아니라, 《보바리 부인》을 쓴 이는 쓸 때 《서른 살의 여인》에서 영감을 받았다. 광대한 양의 소설 속에서 변모하며 살아가는 등장인물들이 인간 희극 내 다른 작품에서도 등장한다는 점은 에밀 졸라와 마르셀 프루스트에게 큰 영감을 주기도 하였다. 이런 발자크의 작품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출판되고 있다. 《계모》는 1906년 영화화되었다. 이후에도 발자크의 수많은 작품들은 영화와 드라마 등으로 각색되며 전 세계에서 새로이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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