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와 만화] 소백산 정상에서 _ 천영필

소백산 정상에서
천영필
바람이 쉬어가니
구름도 머물고
추억도 쉬어가니
세월도 머무는데
속없이
친구는 보챈다
내려갈 길 멀다고

[친구에게들려주는시조협회 제공]
시조의 여운, 현실의 대화… 천영필 「소백산 정상에서」
- 류안 시인
한국의 대표적인 정형시인 시조는 짧은 형식 속에 깊은 정서와 철학을 담아낸다. 천영필 시인의 「소백산 정상에서」는 그 전통을 현대적 감각으로 풀어낸 작품이다. 이 시조는 자연의 고요함과 인간 관계의 온도 차를 절묘하게 대비시키며, 독자에게 잔잔한 여운과 미소를 동시에 선사한다.
시는 소백산 정상에서 시작된다. 바람이 멈추고 구름이 머무는 풍경은 자연의 정적을 상징한다. 이 고요한 순간은 단순한 묘사를 넘어, 인간의 내면이 잠시 멈춰 사색에 잠기는 시간으로 확장된다. 이어지는 구절에서는 “추억도 쉬어가니 / 세월도 머무는데”라는 표현을 통해, 과거의 기억이 떠오르는 순간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감각을 전한다. 시인은 자연과 인간의 감정을 교차시키며,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잠시 멈춰 선 존재의 의미를 되새긴다.
그러나 이 시조의 매력은 단순한 서정에 머물지 않는다. 마지막 연에서는 “속없이 / 친구는 보챈다 / 내려갈 길 / 멀다고”라는 현실적인 대사가 등장한다. 시적 분위기에 젖어 있는 화자와 달리, 친구는 내려갈 길이 멀다며 보채기 시작한다. ‘속없이’라는 표현은 시적 감성에 공감하지 못하는 친구의 태도를 다소 유머러스하게 묘사하며, 시적 사색과 현실적 조급함의 대비를 통해 인간 관계의 다양성을 드러낸다.
이 시조는 짧은 형식 안에 자연, 시간, 감성, 인간 관계를 절묘하게 담아낸다. 산 정상이라는 공간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삶의 여백과 여유를 상징하는 무대가 된다. 천영필 시인은 이 무대 위에서 시적 사색과 현실적 대화를 교차시키며, 독자에게 “멈춤”의 의미를 다시금 되묻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