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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강호의 시조 아카데미 55] 염창권의 "증심사 가는 길"

시인 김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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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을 견디며 스스로를 증명해가는 마음의 서사”

증심사 가는 길

 

염창권

 

 

​산 밭에 묻어 둔 수저 한 벌

 

배 고플까.

 

비탈진 생각은 저문 강을 다 건넜다

 

​네 간 곳, 차마 묻지 못한다

 

찬 빗돌을 올려준다

 

 

돌을 쪼아 탑이나 부도를 세운 곳은

 

그 중심에 고요의 심지가 꽂혀 있다

 

흰 실을 붙들고 피는 꽃

 

젖은 몸이 뜨겁다

 

 

너라는 절 하나를 마음 속에 지은 뒤로

 

시들지 않는 꽃이나 죄가 자꾸 피었다

  

오후의 불티 속에서

 

증심(證心)에 핀, 꽃잎들!

광주광역시 증심사 

이 시조 「증심사 가는 길」은 단순한 사찰로 향하는 여정이 아니라, 상실과 기억, 그리고 내면의 속죄와 깨달음을 향한 정신적 순례를 형상화한 작품이다. 시적 화자는 외부의 길을 걷는 동시에, 자기 내면 깊숙한 곳으로 침잠하는 이중의 여정을 수행한다.

 

첫 수의 산 밭에 묻어 둔 수저 한 벌 / 배 고플까.”라는 구절은 극도로 절제된 언어 속에 깊은 정서를 함축한다. ‘수저 한 벌은 단순한 생활 도구가 아니라, 떠나간 를 향한 최소한의 돌봄이자 애도의 상징이다. 화자는 배 고플까라는 짧은 물음을 통해, 생과 사의 경계를 흐리며 존재의 지속성을 암시한다. 이어지는 비탈진 생각은 저문 강을 다 건넜다에서 비탈진 생각은 흔들리고 기울어진 내면을, ‘저문 강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말한다. “네 간 곳, 차마 묻지 못한다 / 찬 빗돌을 올려준다는 표현은 죽음 앞에서의 언어의 무력함을 보여준다. ‘차마 묻지 못한다는 것은 죽음의 실체를 직면하기 두려운 심리이며, 동시에 그 너머에 대한 불가해성을 인정하는 태도이다.

 

둘째 수는 불교적 공간이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돌을 쪼아 탑이나 부도를 세운 곳은 / 그 중심에 고요의 심지가 꽂혀 있다에서 탑과 부도는 죽음을 기리는 동시에 깨달음을 지향하는 구조물이다. 여기서 고요의 심지는 촛불의 심지처럼, 고요 속에서 타오르는 정신적 중심을 의미한다. 이는 외형적으로는 침묵과 정지의 상태이지만, 내면에서는 끊임없이 타오르는 수행과 성찰의 에너지이다. 이어 흰 실을 붙들고 피는 꽃 / 젖은 몸이 뜨겁다는 구절은 강렬한 역설을 보여준다. ‘흰 실은 생명과 인연의 미세한 끈이며, 그 위에서 피어나는 꽃은 고통 속에서 피어나는 깨달음 혹은 속죄의 형상이다. ‘젖은 몸뜨겁다는 표현은 슬픔과 열망, 죄의식과 구원의 욕망이 동시에 타오르는 상태를 상징한다.

 

셋째 수의 너라는 절 하나를 마음속에 지은 뒤로는 이 시의 핵심이다. ‘는 더 이상 외부의 인물이 아니라, 화자의 내면에 건립된 하나의 성소가 된다. 절은 수행과 참회의 공간이며, 동시에 기억을 봉안하는 장소이다. 화자는 를 잃은 뒤, 그 부재를 내면에 구조화하여 하나의 종교적 공간으로 재구성한다. 그 결과 시들지 않는 꽃이나 죄가 자꾸 피었다는 고백이 이어진다. 여기서 꽃은 사랑과 기억의 지속성을, 동시에 는 지워지지 않는 후회와 자책이다. 꽃과 죄가 동일한 자리에서 피어난다는 점에서, 이 시는 사랑과 죄의식이 분리될 수 없는 관계임을 드러낸다.

마지막 오후의 불티 속에서 / 증심(證心)에 핀, 꽃잎들!”은 전체 시를 관통하는 깨달음의 순간을 제시한다. ‘오후의 불티는 하루가 저물어가는 시간 속에서 마지막으로 타오르는 생의 잔열이며, ‘증심은 마음이 증명되고 드러나는 상태, 곧 깨달음의 경지를 의미한다.

 

이 작품은 사찰로 향하는 길 위에서, 죽음과 부재를 끌어안고 그것을 내면의 성소로 승화시키는 과정을 섬세하게 그려낸다. 그리하여 「증심사 가는 길」은 결국 이라는 물리적 이동을 넘어, 상실을 견디며 스스로를 증명해가는 마음의 서사라 할 수 있다.

김강호 시인 

김강호 시인

1960년 전북 진안 생 

199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조집 『당신 생각 소나기로 쏟아지는 날』외 다수

2024년 44회 가람문학상 수상 

고등학교 1학년 교과서 「초생달」 수록

코리아아트뉴스 전문기자

시인 김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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