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해설] 함순례의 "곡비"
[이승하의 하루에 시 한 편을 49]
곡비
함순례
새벽부터 지붕 두드리는 빗소리에 귀가 열려
가슴을 쓸어내렸다
큰 불길 잡히면 또 하나 잡히겠지
앞이 보인다 싶으면
실핏줄 돌게 마련이지 하다가
왜 이 비는 타버린 폐허 위에 내리는가
왜 산불은 해마다 돌아오는가
처마 끝에 앉아서
꽃망울 터지고 연둣빛 틔워 올리는
앞산을 바라다보는 눈길이 젖는다
뒤늦은 비가 내리고
타버린 것들 위에도 비는 내리는데
집안으로 들인 걸음마다 생기가 돌고
들판으로 나갈 모종판 챙기는 손길이 젖는데
산기슭 아래
속 시커멓게 내려앉아
젖지 못하는 사람들
―『구석으로부터』(애지, 2024)

[해설]
시인도 대신 울어주는 사람
곡비(哭婢)란 옛날 양반의 장례식 때 곡하면서 장례 행렬의 앞에 가던 여자종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 시에서는 시인 자신이 곡비가 되어 운다. 또 산불이 났기 때문이다. 큰불이 잡히면 작은 불이 이어서 나고, 바람이 불면 금방 큰불이 된다. 온 산을 까맣게 태우고 나서야 고대하던 비가 내린다. 농부는 이제 들로 나가 흙을 일구어 씨를 뿌려야 하는데 연두색을 간신히 틔워 올리는 산야를 보고 깊은 시름에 잠긴다. 뒤늦게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데 “산기슭 아래/속 시커멓게 내려앉아/젖지 못하는 사람들”의 비애(悲哀)에 촉촉이 젖은 눈을 보고 시인은 곡비처럼 꺼이꺼이 운다.
이 시는 2022년 여름호 《예술가》에 발표되었던 것이므로 이번에 전국적으로 난 산불과는 상관이 없는 작품이다. 즉, 우리나라는 거의 해마다 봄철이면 화마에 한바탕 시달렸다는 뜻이다. 거의 모든 불이 실화(失火)다. 그러니까 사람이 불을 지른 것이다. 내년에는 산불 예방에 온 국민이 마음을 기울여 산불 없는 해가 되기를 바란다. 올해 산불은 인명 피해까지 많았다. 우리 모두 불을 무서워하고 조심해서 다뤄야 한다. 봄에 바람 부는 들판에서 담배를 피우면 안 되겠다.
[함순례 시인]
1966년 충청북도 보은에서 태어났다. 1993년 《시와사회》로 등단하여 시집 『뜨거운 발』, 『혹시나』, 『당신이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고』, 『울컥』 등을 냈다.
이승하 시인,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시집 『우리들의 유토피아』『욥의 슬픔을 아시나요』『생명에서 물건으로』『나무 앞에서의 기도』『생애를 낭송하다』『예수ㆍ폭력』『사람 사막』 등
평전 『청춘의 별을 헤다-윤동주』『최초의 신부 김대건』『마지막 선비 최익현』『진정한 자유인 공초 오상순』
지훈상, 시와시학상, 편운상, 가톨릭문학상, 유심작품상, 서울시문화상 등 수상
코리아아트뉴스 전문위원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