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하의 하루에 시 한 편을 196] 이희경의 "조용한 식물"
조용한 식물
이희경
집 앞 작은 텃밭에
깻잎 몇 줄 심어두었습니다
큰 기대는 없었습니다
잘 자라면 다행이고
말없이 사라져도 괜찮은 정도의 마음으로
햇빛은 골고루 내리고
비는 가끔씩, 너무 늦지 않게 왔습니다
며칠 뒤, 한 뼘을 훌쩍 넘는 키를 자랑하며
줄기와 잎이 고개를 들고 있었습니다
이름을 불러준 적도 없는데
도시는 여전히 바쁘고
나는 요즘 조용한 식물 하나를 알아갑니다
무언가를 잘 돌본다는 건
내가 나를 덜 다그치는 일과 닮아 있습니다
누군가를 부르지 않고도
누군가에게 묻지 않고도
햇살을 감지하는 일
물기를 기억하는 일
그저 잘 있는 것, 그걸 알게 되는 오후입니다
—『짧은 스파크』(한국문연, 2025)
![조용한 식물 _이희경 [ 이미지 : 류우강 기자]](https://koreaartnews.cdn.presscon.ai/prod/125/images/20250912/1757627545696_850368923.png)
[해설]
식물과의 대화
돌아가신 내 어머니의 유일한 취미가 원예였다. 아파트 베란다에 웬 화분을 그리 많이 갖다 놓았는지 20〜30개는 되는 것 같았다. 10년의 교사생활, 5년의 학교 매점 주인, 30년의 문방구점 주인. 생활전선에서 해방된 이후 딱 10년, 식물을 벗삼아 살다가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종종 말씀하셨다. 화초나 난이나 다 착하고 정직하다. 그래서 나는 얘들을 보면 행복해진다.
연구실이라는 것이 생기자 지인들이 내가 상을 타거나 하면 화분을 선물하는 것이었다. 며칠에 한 번씩, 물을 얼마큼 주라는데 내가 지켜낸 화분은 하나도 없다. 나의 성의 없는 대응으로 말미암아 다섯 그루쯤 되는 화초가 다 죽고 만 것이었다. 이 이후론 화분을 산 적도 없고 땅에 꽃씨를 심은 적도 없다. 평생토록 식물을 가꾼 적도 사귄 적도 없다. 농부는 잡초를 미워하겠지만 나는 잡초의 생명력에 외경심을 느끼곤 한다.
이희경 자신이 집 앞 텃밭에 깻잎 멸 줄을 심었는데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가뭄과 홍수, 태풍과 혹서를 이겨낸 깻잎의 생명력이 대단하다. 이런저런 자연의 광기를 이겨낸 깻잎이 며칠 뒤에 사람 키에 비해 한 뼘을 훌쩍 넘긴 키를 자랑하며 줄기와 잎이 고개를 들고 있었다니! 오오, 자랑스럽구나. 참 장하다. 뭐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리라. 특별히 돌보지 않았는데 쑥쑥 컸고 화자는 조용한 식물과 교감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시의 제5연과 제6연에 주목해 주시길. 일단 느긋하게 살아보려고 한다. 조용한 식물 하나를 알아간다는 것은 미지의 세계와의 조우다. “무언가를 잘 돌본다는 건/ 내가 나를 덜 다그치는 일과 닮아 있습니다”란 무슨 뜻일까. 보살핌, 길들임, 도와줌 같은 낱말과 비슷한 ‘돌봄’이 이 시대에는 빛을 잃고 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묻지 않고도/ 햇살을 감지하는 일/ 물기를 기억하는 일”은 식물과 나의 교감이 이뤄낸 일이다. 시인이 식물에게 배운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깻잎은 악착같이 뿌리를 내리고, 정직하게 열매를 맺는다. 동료애가 투철해 외경심까지 느끼게 된다. 살아서 그저 잘 있는 것만 해도 장하다. 깻잎이 그렇듯이. 그대가 그렇듯이.
[이희경 시인]
충남 부여 출생. 2022년 《심상》으로 등단했다. 현재 동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문예창작과에 재학 중이다.
이승하 시인,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시집 『우리들의 유토피아』『욥의 슬픔을 아시나요』『생명에서 물건으로』『나무 앞에서의 기도』『생애를 낭송하다』『예수ㆍ폭력』『사람 사막』 등
평전 『청춘의 별을 헤다-윤동주』『최초의 신부 김대건』『마지막 선비 최익현』『진정한 자유인 공초 오상순』
지훈상, 시와시학상, 편운상, 가톨릭문학상, 유심작품상, 서울시문화상 등 수상
코리아아트뉴스 전문위원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