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하의 하루에 시 한 편을 290] 우영원의 "율무차"
율무차
우영원
새벽 세 시 공원 벤치에 소년이 누워 있다
술 냄새는 나지 않고 힙합바지에 슬리퍼
편의점에나 잠깐 들를 만한 옷차림이다
흔들어 깨우니 부스스 눈을 뜨며
아, 왜요? 한마디 하고는
귀찮다는 듯 도로 눈을 감는다
여기서 주무시면 입 돌아갈 수도 있어요
저절로 이빨이 맞부딪칠 정도로 맵찬 날씨다
냅둬요 내가 알아서 해요
여기서 주무시면 위험합니다
괜찮다고요
신분증 보여주세요
아, 씨 왜 자꾸 귀찮게 해요? 신분증 없어요
그럼 찜질방이나 모텔 가서 주무세요
저 미성년자예요
그제야 실토하는 미성년자
집 어디야? 집에 가서 자야지
집 나왔어요 못 들어가요 아니 안 들어가요
그럼 파출소로 같이 가자 따뜻한 율무차 타줄게
율무차를 좋아하는 십 대답게 순순히 따라온다
두 봉지 넣었어
웃으며 율무차를 내미니 저도 따라 웃는다
엄마가 집 나간 게 내 탓이에요?
맨날 술 먹고 때리니까 나간 걸 왜 나한테 뒤집어씌울까요?
지금도 술만 먹으면 다 때려 부숴요
이제 같이 못 살아요
청소년도 살기 싫은 사람하고 안 살 권리가 있는 거잖아요
따끈한 율무차의 마력에 걸린 걸까?
묻지도 않은 속말을 술술 털어놓는다
이름이 뭐야? 집이 어딘데? 학교는 다녀?
그러면서도 인적사항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발설하지 않는 게 좀 불안하다
이제 저 잡아둘 근거 없죠?
율무차를 다 마시고 일어서는 아이를
좀 더 잡아둘 근거는 없을까?
얘, 율무차 한 잔 더 마시고 가
—『빈칸』 제2호(인천문화재단 한국근대문학관, 2024)

[해설]
이 시는 현직 여성 경찰관의 경험담이다. 새벽 세 시 공원 벤치에 누워 있는 소년에게 다가가서 잠을 깨웠다. 추운 날 딱딱하고 차가운 데 얼굴을 대고 자면 안면신경마비가 오는 경우가 많기에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소년에게 경찰관은 존대어로 말한다. “여기서 주무시면 위험합니다” “신분증 보여주세요” 그런데 아이의 태도가 영 불손하다. 경찰관은 대화 과정에서 몇 가지를 알아낸다. 미성년자로서 가출한 것임을.
소년의 어머니는 남편의 술주정과 폭력이 지겨워 집을 나갔고, 소년은 지금도 아버지한테 수시로 맞고 있다. 폭력의 일상화는 정말 무섭다. 아버지는 술에 취하면 얼마 남아 있지도 않은 가재도구까지 부순다. 집에 가기 싫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제 같이 못 살아요/ 청소년도 살기 싫은 사람하고 안 살 권리가 있는 거잖아요” 소년의 볼멘소리가 가슴을 친다. 무슨 죄를 지었다고 이 소년이 이런 형벌을 받아야 하는가. 집이나 학교로 연락을 할까 봐 인적사항은 말하지 않는다. “이제 저 잡아둘 근거 없죠?” 짜식, 제법 똑똑하다.
학교명이 고봉중고등학교인 서울소년원에 갔을 때, 신촌정보통신학교인 춘천소년원에 갔을 때, 바로 이런 소년들이 20여 명 시창작 특강 강사인 내 앞에 앉아 있었다. 표정에 어려 있는 것은 좌절감과 패배의식이었다. 말을 시켜봐도 시큰둥, 반응이 없었다. 시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은 이곳 생활을 마치고 돌아갈 곳이 있지. 집으로 학교로. 나는 고1 때 퇴학을 당했고 집을 뛰쳐나가 서울로 부산으로 떠돌아다녔단다. 신문에까지 났지. 그래서 시인이 됐어. 시란 자기 마음에 있는 것을 글로 표현하는 거야.” 아래는 소년들이 써낸 시다.
어릴 적부터 놀기만 좋아하던 나
아버지한테 대들기도 했던 나
중학생이 되어서 사고를 쳐버린 나
평생 안 울 것같이 당당하신 아버지
그날 나는 처음으로 아버지가 우는 걸 보았다
사고를 친 아들, 우시는 아버지
세상이 꺼지듯 내 마음도 찢어졌다
그 사랑에 정신차려 바르게 살려고 하는 나
이제 더 이상 울지 말기를 바라며 기도한다
나의 사랑, 아버지
—고니, 「아버지」 전문
누군가에겐 그립고
누군가에겐 따뜻한
나에겐 가슴 아픈 한마디
내 아들 아프지 마
지금은 듣지 못할 한마디
내 아들 아프지 마
너무 아파서 하늘나라로 가버린 아빠
때늦은 지금
가슴 치며 외쳐본다
아빠도 아프지 마
—환, 「아프지 마」 전문
아이들은 본성이 이렇게 착하다. 어른들이 아이를 범죄자의 길로 가게 하면 절대로 안 된다. 우리 모두 경찰관이 소년에게 따뜻한 율무차를 주었던 그 마음을 갖고 살아갈 수는 없을까?
[우영원 시인]
대학에서 경찰행정학을 전공. 졸업한 뒤 경찰공무원 시험에 합격하여 현재 지구대에 근무하고 있음. 2023년 대산문화재단에서 창작지원금을 받으면서 작품 활동 시작. 청소년시집 『마음 아픈 사람들이 많은가 봐』(푸른사상)를 펴냄.
이승하 시인,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이승하 시인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시집 『우리들의 유토피아』『욥의 슬픔을 아시나요』『생명에서 물건으로』『나무 앞에서의 기도』『생애를 낭송하다』『예수ㆍ폭력』『사람 사막』 등
평전 『윤동주-청춘의 별을 헤다』『최초의 신부 김대건』『마지막 선비 최익현』『진정한 자유인 공초 오상순』
지훈상, 시와시학상, 편운상, 가톨릭문학상, 유심작품상, 서울시문화상 등 수상
코리아아트뉴스 전문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