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영임의 시조 읽기 9】조영자의 "그렇듯, 꽃은 피어"
그렇듯, 꽃은 피어
조영자
몸통에 꽃 피웠네
절단된 벚나무가
가지도 줄기도 없이
여봐라, 여봐란듯이
봄날을 어기지 않고
기어코 해냈구나
8개월 때 어미 잃고
제주 4·3에 아비 잃고
6·25 동란 어느 골짝
한쪽 눈도 앗겨버린
아버지 한 생의 시간
우리를 피웠구나
《시조시학》 (2025. 봄호)

공간은 참 중요하다.
텅 빈 곳일 수도 있고 물리적, 심리적으로 넓게 퍼져있는 장소일 수도 있다. 같은 날 같은 시각에 태어난 사람들도 삶의 모습은 제각각이다. 왜냐하면 공간 즉, 환경이 다르기 때문이다. 무더위에 늘 노출되어 있는 아프리카와 초강대국인 미국에서 태어난 삶은 출발선이 다르다.
8개월 때 어미 잃고
제주 4·3에 아비 잃고
6·25 동란 어느 골짝
한쪽 눈도 앗겨버린
반도라서 섬이라서 겪을 수밖에 없던 아버지의 삶이 「그렇듯, 꽃은 피어」 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가족을 잃은 소년은 고난과 불안정성이 족쇄처럼 따라다녔을 것이다. 그러나 슬픔도 아픔도 오래 참고 견디다보면 진흙처럼 찰기가 생겨, 끝끝내 단단한 힘이 생긴다. 그 힘은 시인을 피워냈고 가족을 피워냈다.
머지않아 연보랏빛 라일락꽃의 계절이다. 그 꽃의 향기는 휘발성이 강해 넓은 공간을 지배한다. 역사의 수레바퀴에서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삶을 짊어진, 당신들께 라일락꽃향기를 드리고 싶은 사월이다.

서귀포 강정에서 태어나 2022년 고산문학대상 신인상을 수상했으며, 시집 『시간은 한 생을 벗고도 오므린 꽃잎 같다』
[편집자주: "강영임의 시조 읽기" 코너는 매주 수요일 아침에 게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