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고 푸른 밤, 한 송이 모란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낸다. 화려하게 만개한 꽃이지만 그 안에는 빛만 있는 것이 아니다. 겹겹의 꽃잎 사이에는 상처와 결핍, 두려움이 숨어 있고, 그 어둠을 품은 자리에서 다시 희망이 피어난다.

전시포스터

한국화와 칠보를 넘나들며 독자적인 조형세계를 구축해온 서효진 작가가 오는 8월 26일부터 31일까지 서울 종로구 인사동 경인미술관 아틀리에에서 개인전 ‘수류화개(水流花開)’를 연다. 이번 전시의 부제는 ‘형상 너머의 형상 : 흐름과 피어남’이다.

 

‘물이 흐르고 꽃이 핀다’는 뜻을 품은 ‘수류화개’는 이번 전시의 미학을 압축한다. 억지로 재촉하지 않아도 물은 흐르고, 때가 오면 꽃은 핀다. 작가는 이러한 자연의 순환을 인간의 삶과 내면에 겹쳐 놓는다. 삶에서 마주하는 변화와 상처, 불안과 결핍까지도 결국 또 다른 성장과 희망을 향해 흐르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서효진은 이번 작업에서 단순히 아름다운 꽃을 그리는 데 머물지 않는다. 그에게 정원은 감상의 대상이 아니라 인간 내면으로 들어가는 통로이며, 작품이 놓인 공간은 스스로를 비추어 보는 ‘비밀의 정원’이 된다. 작가는 푸른 밤의 정원 속에 인간의 그림자와 희망을 함께 담아내고, 그곳에서 아이의 꿈이 꽃으로 피어나 삶의 가치와 치유의 순간으로 이어지는 장면을 그리고자 했다.

 

그 출발점에는 우연히 마주한 모란꽃의 기억이 있다. 일상에 지친 어느 순간 자연의 형상으로부터 위로받았던 경험은 작가에게 “삶의 가치는 어디에서 오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했다. 전통적으로 부귀와 영화의 상징으로 여겨져 온 모란을 그는 조금 다른 시선으로 바라본다. 인간의 욕망뿐 아니라 그 이면에 자리한 나약함과 결핍, 두려움까지 품고 있는 존재로 해석한 것이다. 그런 내면의 그림자를 외면하지 않고 끌어안는 과정이야말로 자아의 통합과 치유로 나아가는 길이라는 것이 작가의 생각이다.

 

이번 전시에서 중심을 이루는 ‘여정’ 연작은 이러한 작가의 세계관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2026년작 〈여정〉은 순지와 삼채지에 수간채색과 칠보를 사용해 제작됐다. 화면을 가득 채운 푸른 모란과 유기적으로 이어지는 꽃잎의 흐름은 마치 깊은 물속을 천천히 지나가는 듯한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작가는 ‘물빛 여정’을 “내면의 흐름을 따라가며 빛을 발견하는 삶의 길”이라고 설명한다. 여정은 내면의 강을 따라 흐르는 길이며, 그 길에서 인간은 빛과 그림자를 동시에 만나고 마침내 희망의 꽃을 피워내는 순간에 도달한다.

 

서효진 <여정_Ⅰ> 2026, 순지와 삼채지에 수간채색 칠보, 62 x 72
서효진 <여정_Ⅱ> 2026, 순지와 삼채지에 수간채색 칠보, 62 x 72
서효진 <여정_Ⅲ> 2026, 순지와 삼채지에 수간채색 칠보, 62 x 72

이어지는 〈여정Ⅰ〉, 〈여정Ⅱ〉, 〈여정Ⅲ〉 역시 같은 흐름을 공유한다. 세 작품은 각각 다른 방향과 밀도의 꽃과 잎을 보여주지만, 전체적으로는 하나의 정원이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순지와 삼채지 위에 수간채색과 칠보를 더한 화면에는 전통적인 한국화의 재료감과 공예적 물성이 함께 살아 있다.

서효진<푸른 밤의 정원> 2025 5합장지에 수간채색 칠보 적동 mixed media 칠보 91 x 91

푸른색은 서효진의 작품세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것은 단순한 색채가 아니라 밤이며, 물이며, 기억이자 무의식의 깊이다. 2025년작 〈푸른 밤의 정원〉에서는 수간채색과 칠보, 적동 등 다양한 재료가 한 화면 안에서 어우러진다. 현실의 정원을 재현하기보다는 꿈과 기억, 현실과 상상이 서로 침투하는 심리적 공간에 가깝다.

 

작가는 자신의 작업을 “꿈을 통해 현실을 확장하고, 현실 속에서 꿈을 실현하는 예술적 순환을 탐구하는 여정”이라고 밝힌다.

 

평면 회화에서 출발한 꽃은 입체 작업으로도 확장된다. 〈모란이 피기까지는-눈 속의 향기〉는 칠보와 황동, 백동, 세라믹을 활용한 가변 설치작품이다. 차가운 바위처럼 보이는 형태 위로 가느다란 줄기와 꽃이 솟아오른다. 작가는 이를 두고 “찰나의 화려함, 바위 위에 영원히 머물다”라고 적었다. 순간적으로 피었다 지는 꽃의 시간을 단단한 물성과 결합시키며, 덧없는 순간과 지속되는 기억 사이의 긴장을 보여준다.

 

2024년 제작된 〈푸른 모란Ⅰ~Ⅳ〉 연작에서는 모란 자체의 조형성이 더욱 강하게 부각된다. 3합장지에 분채와 수간채색, 은박과 혼합매체를 사용해 제작된 작품들은 각각 26×26cm 크기의 화면 속에서 서로 다른 개화의 순간을 보여준다. 꽃잎의 윤곽과 반복되는 곡선, 깊고 선명한 청색은 전통회화와 현대적 장식성 사이를 오간다.

 

그러나 이번 전시에서 중요한 것은 꽃이 얼마나 화려한가가 아니다. 꽃이 피기까지 지나온 시간과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마음이다.

서효진이 말하는 ‘비밀의 정원’에는 밝음만 존재하지 않는다. 삶의 두려움과 결핍, 상처와 불안도 함께 자리한다. 작가는 그것을 지우거나 감추는 대신 화면 안으로 끌어들인다. 그리고 그 그림자 한가운데에서 다시 작은 빛을 찾아낸다. ‘Every cloud has a silver lining’이라는 표현처럼 어둠의 가장자리에는 언제나 빛의 가능성이 있다는 메시지다.

서효진 <모란이 피기까지는_눈 속의 향기> 2025 칠보,황동,백동,세라믹_가변크기

그런 의미에서 ‘수류화개’는 꽃을 주제로 한 전시이면서 동시에 한 인간이 자신의 내면으로 걸어 들어가는 이야기다. 물은 멈추지 않고 흐르고, 꽃은 자신의 때가 되었을 때 핀다. 삶 역시 수많은 흔들림과 기다림을 통과하며 조금씩 앞으로 나아간다.

 

서효진은 현재 숙명여자대학교 조형예술학과 한국화 박사과정에 재학 중이며, 2015년 미래엔 중학교 미술교과서 수록 작가로 선정됐다. 2017년 글로벌 아트콜라보 엑스포에서 한젬마 선정 100인 작가에 이름을 올렸으며, 아시아프에 2019년, 2020년, 2022년 참여했다. 국내외에서 개인전과 단체전을 이어왔고, 중국 상하이와 항저우, 일본 도쿄와 나고야, 대만, 프랑스 파리 등에서도 작품을 선보였다.

서효진 <봄날이 되기를 바라며> 2023 enamel ,brass , red copper, gold leaf 90 x 95 x 45mm

이번 경인미술관 전시는 작가가 오랫동안 탐구해온 한국화와 칠보, 회화와 공예의 경계를 한자리에서 살펴보는 기회이기도 하다. 특히 푸른 모란과 정원이라는 반복적 이미지가 어떻게 개인의 기억과 내면, 삶의 가치와 치유의 문제로 확장돼 왔는지를 보여준다.

서효진 <여정> 2026, 순지와 삼채지에 수간채색 칠보, 45 x 53 10호

전시장에 들어선 관객은 어느 순간 하나의 푸른 정원 안에 서게 된다. 거대한 모란의 꽃잎을 따라 시선을 옮기다 보면 그것은 더 이상 하나의 꽃으로만 보이지 않는다. 때로는 흐르는 물이 되고, 깊은 밤이 되며, 누군가의 기억과 꿈이 된다.

 

그리고 그 끝에서 ‘수류화개’라는 네 글자가 다시 다가온다.

 

물은 흐르고, 꽃은 핀다.

 

서효진의 이번 전시는 바로 그 자연스러운 순리 속에서 우리 각자의 삶 또한 저마다의 속도로 피어나고 있음을 조용히 이야기한다.


전시 개요

전시명 : 서효진 개인전 ‘수류화개(水流花開)’
부제 : 형상 너머의 형상 : 흐름과 피어남
전시기간 : 2026년 8월 26일~8월 31일
전시장소 : 경인미술관 아틀리에
주소 : 서울 종로구 인사동10길 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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