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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해설] 남○○의 "발도장"
문학/출판/인문
[ 이승하의 하루에 시 한 편을 ]

[시 해설] 남○○의 "발도장"

이승하 시인
입력
[이승하의 하루에 시 한 편을 146]

발도장  

 

남○○

 

종이 위에 태어난 생애 최초의 눈부심

손가락 두세 마디 될까요

싸라기 첫눈처럼 호호 불면 날아갈 것 같네요

 

귀를 가져가니 소녀의 웃음이 오롱오롱 들리고

실연했나요 통곡 소리가 이어집니다

그러고 보니 몇 달이고 진정되지 않던 울음

발바닥에 깊은 눈물샘이 있어 그러지 않았을까요

 

아내의 손을 잡아주지도 못했는데요

야속함 대신 옥중 남편에게

첫애의 족인(足印)을 보냈습니다

이 아이가 다섯 살이 되면 만날까요

열 살이 되면 만날까요

아내에 이어 미안해야 할 사람이 생겼군요

 

큰 발바닥과 작은 발바닥을 포개어 보는 겨울밤

창살 밖으로 함박눈이 비치고 있습니다

포스트 김연아가 되어

그 위에 또렷한 족적(足跡)을 남겨주었으면

 

아닙니다 아닙니다 사랑이란 허허 욕심이군요

다 상처투성이 발일걸요

다만 엄마 코 고는 소리 훅훅 내뱉는 숨비소리

두 발바닥에 쌓여 두꺼워졌음을 기억해 주기를

 

—《새길》(법무부, 2017년 겨울호)

 

발도장 [이미지:류우강 기자]

  [해설] 

 

   20년 세월이 흘렀군요

 

  남형! 우리는 6년 정도 펜팔을 했었지요. 2006년부터 2011년까지. 이사를 하면서도 그대가 제게 보냈던 편지를 버리지 않고 지금까지 갖고 있습니다. 사랑했던 여인의 목숨을 빼앗아 그대는 무기징역을 살고 있었고, 시를 쓰기 시작했기에 『이승하 교수의 시 쓰기 교실』을 구해 읽고는 중앙대학교로 편지를 보냈습니다. 생면부지의 그대와 펜팔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대는 단조로운 일과를 시 쓰기를 통해 극복하려 애쓰고 있었지만 몇 해가 지나도 크게 향상되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답보상태를 못 벗어나자 저는 스승들이 제게 썼던 특단의 방법으로 자극을 주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이건 시가 아닐세.”(서정주) “이런 기어(綺語)를 구사한다는 것은 죄를 짓는 거네.”(구상) “앞으로 소설 쓰지 마.”(신상웅) 아아! 저의 그 편지 이후 그대는 서신을 끊고 말았습니다. 공교롭게도 2012년부터 저는 법무부에서 발행하는 《새길》의 심사위원이 되었습니다. 2013년 가을호 18쪽에는 그대의 수필을 읽고 쓴 저의 심사평이 다음과 같이 실려 있지요. 제 글 기억하고 계시죠?

 

  “누나에게 올리는 편지 형식으로 되어 있지만 지금 이 세상에 계시지 않는 아버지에 대한 죄송스러움과 사무치는 그리움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특히 아버지가 등으로 우는 모습을 보았다는 부분은 놀라운 시적 표현입니다. 아무리 아파도 매일 매를 맞고 싶다고 한 부분도 글쓴이의 진정성이 느껴지는 가슴 뭉클한 대목입니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 2017년 《새길》에 실린 그대의 시 「발도장」을 보고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시가 정말 많이 발전했기 때문이지요.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는 남편에게 아내가 아기의 발을 도장 찍듯이 찍어 보낸 발도장[족인]을 소재한 이 시에는 아기를 볼 수 없는 남편의 애통한 심정이 잘 그려져 있습니다. 제2연에서는 벽의 이쪽과 저쪽에서 살아가야 하는 부부의 애타는 심정을 그렸고, 제4연에서는 작은 발이 점점 커져 김연아의 발처럼 되면 좋겠다는 바람을 담아봅니다. 마지막 연에서는 혼자 아기를 키워나가야 하는 아내에 대한 미안한 마음을 담았습니다. 시는 다른 분이 심사해 저의 평을 전할 수 없었지만 내심 박수를 힘껏 쳤답니다.

 

  그런데 저는 이 시가 완전히 허구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대는 결혼해본 적이 없었고 아기 아빠가 되어 본 적도 없었습니다. 이 시가 간접체험의 산물임을 잘 알고 있지만 저의 감동이 약화되지 않았습니다. 시를 문예지에 투고해보라고 권유하고 싶었지만 제 편지를 거듭 씹은 상태라 다시 보내지는 않았습니다. 다행히도 그대는 그곳에서 독서를 게을리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데이비드 소로우의 『월든』을 매년 한 번씩 빌려 읽어 열 번을 읽고 썼다는 독후감도 잘 보았습니다. 2015년 여름호였죠. 이렇게 끝납니다.

 

  “2년이 좀 지나 소로우는 월든을 떠나 글쓰기와 강연을 하거나 측량기사 일을 하며 나머지 인생을 보내게 된다. 그가 원한 것은 숲속 생활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삶이었기에 미련 없이 떠나게 된 것이다. 우리도 언젠가 교도소를 떠나게 되는 날이 올 것이다. 그때 후회 없이 살았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면 소로우의 오두막처럼 교도소의 공간도 빛날 것이다. 우리는 교도소에서 무엇을 찾고 있는가?”

 

  희망을 잃지 않고 계시는 남형! 이번 여름 정말 많이 덥습니다. 건강에 유의하시고, 매사에 자중자애하시고, 시도 더 열심히 쓰기 바랍니다. 친필로 쓴 그대의 시를 읽고 싶습니다.

 

이승하 시인,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시집 『우리들의 유토피아』『욥의 슬픔을 아시나요』『생명에서 물건으로』『나무 앞에서의 기도』『생애를 낭송하다』『예수ㆍ폭력』『사람 사막』 등

 

평전 『청춘의 별을 헤다-윤동주』『최초의 신부 김대건』『마지막 선비 최익현』『진정한 자유인 공초 오상순』

 

지훈상시와시학상편운상가톨릭문학상유심작품상서울시문화상 등 수상

 

코리아아트뉴스 전문위원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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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하시인#시해설#발도장#새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