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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해설] 이어령의 "김자반"
문학/출판/인문
[ 이승하의 하루에 시 한 편을 ]

[시 해설] 이어령의 "김자반"

이승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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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하의 하루에 시 한 편을 104>

 

김자반

 

이어령

 

김을 모르고 서양 사람들은

카본 페이퍼라 한다.

모르시는 말씀. 그건 초록색 바다 밑

몰래 흑진주를 키운 어둠이라네

 

파도가 가라앉아 한 켜 한 켜 쌓여서

만들어낸 바다의 나이테를 아는가

 

어느 날 어머니가 김 한 장 한 장

양념간장을 발라 미각의 켜를 만들 때

하얀 손길을 따라 빛과 바람이 칠해진다네

 

내 잠자리의 이불을 개키시듯

내 헌 옷을 빨아 너시듯

장독대의 햇빛에 한 열흘 말리면

김 속으로 태양과 바닷물이 들어와 간을 맞춘다

 

김자반을 씹으면 내 이빨 사이로

여러 켜의 김들이 반응하는 맛의 지층

네모난 하늘과 바다가 찢기는 맛의 평면

 

이제는 손이 많이 간다고 누구도 만들지 않는

어머니 음식이라네

 

빈 장독대 앞에서 눈을 감으면

산간 뜰인데도 파도 소리가 나고

채반만큼 둥근 태양의 네모난 광채

고향 들판이 덩달아 익어간다네

 

—『시로 맛을 낸 행복한 우리 한식』(문학세계사, 2013)에서

 

   

김자반

   [해설

   김이 기억하는 바다

   

  이 시를 읽고 제일 먼저 한 생각은, ‘이어령 선생은 시를 써도 잘 썼겠구나하는 것이었다. 한국시인협회에서 76명의 시인에게 음식 소재 시를 청탁했는데 어떻게 하여 전 장관이자 문학평론가 겸 문화평론가인 이어령 선생에게 시 청탁할 생각을 했는지, 정말 신기하다. 각자 먼저 음식부터 정해놓고 한국시인협회로 연락하면 찜한 것이 되었다. 이어령 선생은 아무도 택하지 않은 김자반을 갖고 쓰겠다고 했고 이 작품을 보내왔다.

 

  김은 바다를 토양으로 해서 자라는 식물이다. 김을 바다의 나이테라고 하다니! 게다가 파도가 가라앉아 한 켜 한 켜 쌓여서/ 만들어낸 바다의 나이테라고 하다니 기가 막힌 표현이다. 그 김을 잘게 손으로 찢은 뒤에 들기름을 큰술씩 나누어 넣고 고루 섞은 후, 설탕과 맛소금을 추가한다. 약불에서 김이 초록빛이 돌 때까지 천천히 볶는다. 불을 끄고 깨소금을 넣어 섞어주면 김자반이 된다. 이어령 선생은 순서를 바꿔 김 한 장 한 장에 양념간장을 발라 미각의 켜를 만들고 하얀 손길을 따라 빛과 바람이 칠해진다고 보았다. 4연도 기가 막힌다. 김 속으로 태양과 바닷물이 들어와 간을 맞춘다니. 백면서생인 이어령 선생이 김자반 만드는 것을 어릴 때 보았나?

 

  “네모난 하늘과 바다는 김이다. 자, 이제 김자반을 입에 넣고 씹는다. “네모난 하늘과 바다가 찢기는 맛의 평면을 음미하라고 한다. 어머니는 양념도 간단하게 넣어 너무나 뻔한 반찬을 하나 만들었는데 참 신기한 조화다. 마지막 연 빈 장독대 앞에서 눈을 감으면/ 산간 뜰인데도 파도 소리가 나고/ 채반만큼 둥근 태양의 네모난 광채/ 고향 들판이 덩달아 익어간다네에 이르면 김자반이라는 지극히 평범한 반찬이 천상의 음식으로 승화된다. 하늘과 바다의 조화에 땅의 양념이 가세하니 김자반은 보통 반찬이 아니다. 우리 이제 김자반을 먹을 때면 성인이 된다. 해탈하느냐 마느냐는 그다음 문제다.

 

  [이어령 전 장관]

   

  1934년 충남 아산에서 태어났다.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박사, 문학평론가, 이화여대 석좌교수, 동아시아 문화도시 조직위원회 명예위원장, 유네스코 세계문화예술교육대회 조직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 <조선일보> <중앙일보> <경향신문> 등 여러 신문의 논설위원을 지냈으며, 월간 《문학사상》의 주간으로 편집을 이끌었다. 서울 올림픽 개폐회식을 주관했으며 초대 문화부장관을 지냈다.

대표 저서로 『지성에서 영성으로』『의문은 지성을 낳고 믿음은 영성을 낳는다』『흙 속에 저 바람 속에』『축소지향의 일본인』『생명이 자본이다』『젊음의 탄생』 등이 있고, 소설 『장군의 수염』『환각의 다리』와 시집 『어느 무신론자의 기도』를 펴냈으며, 희곡과 시나리오 「기적을 파는 백화점」「세 번은 짧게 세 번은 길게」「사자와의 경주」 등을 집필했다. 2021년 한국문학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문화예술 발전 유공자로 선정되어 금관문화훈장을 수상했다.

이승하 시인,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이승하 시인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시집 『우리들의 유토피아』『욥의 슬픔을 아시나요』『생명에서 물건으로』『나무 앞에서의 기도』『생애를 낭송하다』『예수ㆍ폭력』『사람 사막』 등

 

평전 『청춘의 별을 헤다-윤동주』『최초의 신부 김대건』『마지막 선비 최익현』『진정한 자유인 공초 오상순』

 

지훈상시와시학상편운상가톨릭문학상유심작품상서울시문화상 등 수상

 

코리아아트뉴스 전문위원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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