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하의 하루에 시 한 편을 237] 동시영의 "만추" 외 6편
만추 외 6편
동시영
슬픔 없이 우는 배우처럼
낙엽이 슬픔 없이 지고 있다
빗자루 명상
나무는 거꾸로 선 빗자루
오늘도
하루 종일
허공을 쓸고 있다
눈꽃
눈도
나무에
내려야만 꽃이 된다
나무는
더울수록 옷을 입고
추울수록 옷을 벗네
나무와 새
나무가 새의 그네인가 했더니
날아간 새가
나무의 그네였네
나뭇잎
나뭇잎은 미풍에도 떨린다
순간을
아! 하는 감동으로 맞으라고
세상에서 가장 설레는 건 지금
나무
날마다 하늘을 여는 열쇠
키로 문을 연다
―시선집 『기억의 형용사』(황금알, 2025)

[해설]
나무는 매일 도를 닦는다
동시영의 시선집에는 두 쪽이나 세 쪽을 차지하는 시들도 꽤 많지만 이와 같이 아주 짧은 시들이 있어서 눈길을 끌어당긴다. 특히 나무 소재 시 중에서 이처럼 짧은 시들이 있다. 이들 시편의 의미를 말할 필요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촌평을 쓰면 다음과 같다.
「만추」…나무도 낙엽도 아무 감정이 없는데 사람은 낙엽을 보고 소외감이나 상실감을 느낀다. 공연히 감상(感傷)에 빠진다.
「빗자루 명상」…나무를 거꾸로 선 빗자루로 본 상상력이 재미있다. 나무들이 하루 종일 허공을 쓸고 있다니, 아주 낯설고 시각적인 표현이다.
「눈꽃」…눈이 어디에 떨어지느냐에 따라 꽃이 되기도 하고 진흙길이 되기도 한다. 사람도 어디에 있느냐가 중요하듯이.
「나무는」…사람하고는 반대다. 우리는 추우면 옷을 무겁게 입는데 나무는 옷을 벗으니, 수수께끼로 만들어도 되겠다. 더우면 옷을 입고 추우면 옷을 벗는 것은?
「나무와 새」…역설적인 사고방식이 재미있다. 나무가 부동인가? 아니다. 나무가 새를 선택하고 있다. 새가 나무의 그네라니 기발한 생각이다.
「나뭇잎」…미풍에도 흔들리는 것이 나뭇잎이다. 우리도 나뭇잎을 본받아 자주 감동하는 게 좋은데 다들 무뚝뚝하다. 얼굴도 무표정하다.
「나무」…키는 영어로 하면 length, statue, height 중 하나가 되겠지만 이 시에서는 key가 아닐까? 나무를 “날마다 하늘을 여는 열쇠”라고 하니 인간보다 신에 훨씬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하늘과 인간 사이에 나무가 있는 것인가.
지구 온난화를 늦추려면 우리는 나무를 잘 돌보고 많이 심어야 한다. 우리 조상의 나무 숭배 사상은 「용비어천가」를 보면 알 수 있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아니 움직일 새, 꽃 좋고 열매 많나니”로 시작한다. 나무를 나라의 부강과 자손의 번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아서 그렇게 썼던 것이다. 사육신 중 한 사람인 성삼문은 “이 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꼬 하니,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 되었다가” 하면서 소나무의 고고한 절개를 칭송하였다. 당산나무, 神樹, 神木, 솟대 등을 생각해보면 우리 조상은 나무를 신성시했다.
동시영 시인의 시를 읽으니 더욱더 나무를 귀하게 여겨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산불은 절대로 내지 말아야 한다. 최근 10년간(2015~2024) 산불은 연평균 546건, 피해 면적 4,003ha로 집계되며 2020년대 들어 피해 면적이 급증했다고 한다. 그런데 아직 통계는 나오지 않았지만 올해의 산불 피해는 예년의 몇 갑절이라고 한다. “날마다 하늘을 여는 열쇠”인 나무들을 이렇게 함부로 대했다가는 우리 모두 천벌을 받을 것이다. 윤도현의 <가을 우체국 앞에서>를 흥얼거려 본다. 지난 겨울 눈보라에도 우뚝 서 있는 나무들같이 하늘 아래 모든 것이 저 홀로 설 수 있을까.
[동시영 시인]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이후 한양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을 졸업했다(문학박사). 그후 독일 레겐스부르크 대학교 인문학부에서 수학했으며, 한국관광대학교 교수와 중국 길림 재경대학교 교수를 역임했다. 2003년 계간 《다층》으로 등단한 이후, 2005년에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지원을 받았고, 시와시학상 젊은시인상, 한국불교문학상, 동국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시집 『미래사냥』『낯선 신을 찾아서』『신이 걸어주는 전화』『십일월의 눈동자』『시간의 카니발』『비밀의 향기』『일상의 아리아』『펜 아래 흐르는 강물』 등을 펴냈다. 그 외 저서로는 『노천명 시와 기호학』『한국문학과 기호학』『현대시의 기호학』『여행에서 문화를 만나다』 등이 있다.
이승하 시인,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시집 『우리들의 유토피아』『욥의 슬픔을 아시나요』『생명에서 물건으로』『나무 앞에서의 기도』『생애를 낭송하다』『예수ㆍ폭력』『사람 사막』 등
평전 『청춘의 별을 헤다-윤동주』『최초의 신부 김대건』『마지막 선비 최익현』『진정한 자유인 공초 오상순』
지훈상, 시와시학상, 편운상, 가톨릭문학상, 유심작품상, 서울시문화상 등 수상
코리아아트뉴스 전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