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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희의 수필 향기] 모두 봄이야 -김영희

수필가 김영희 기자
입력

    '온난화로 지구 온도가 올라간 것이 맞아?'하는 의구심이 고개를 들게 했던 이번 겨울 날씨는 참으로 매서웠다. 냉랭한 경제 상황까지 겹쳐서 '과연 봄이 올까?'하는 걱정이 들기도 했다. 계절은 분명 봄으로 바뀌는데 우리네 삶은 봄이 오고 있는지, 어디쯤 봄이 와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밤새 눈이 내렸다. 흑빛 어둠 속에서 하얀 눈만이 눈부시게 빛났다. 소복소복 내리는 눈을 맞으러 나가고 싶었지만, 기복이 심하여 한 달 가량을 감기로 고생하고 겨우 떨쳐낸 내 몸은 한사코 주저했다. 


    '참아라. 참아라. 내일 아침에 나가봐라.' 


    이런 때는 나를 잠시 내려놓아야 하는 게 맞을 것이다. 법정스님의 무소유는 이럴 때도 통하는가. 생각만으로 모든 것을 하기에는 늦은 나이가 된 것이리라.  내 몸은 머릿속 생각에게 말한다. 조금만 천천히 가자고. 앞서가는 생각에 내 몸이 또 말한다. 서두르지 말고 내려놓으라며 네 몸에 생각을 맞추라고. 


    문학 행사를 마치고 늦게 잠든 문우들은 아직 꿈나라인데 나는 일찍 잠에서 깼다. 잠자리가 바뀌어 2시간 정도나 눈을 붙였을까. 창문 커튼을 살짝 젖혔다. 눈은 아직도 보슬보슬 내리고 있었다. 창문 밖에서 눈이 나에게 손짓했다. 


    급한 마음에 샤워를 서둘러 끝내고 1층으로 내려갔다. 유리문 너머에 사뿐히 눈이 내린다. 잠시 '우산을 가져올까?'하는 생각이 스쳤지만 시간이 아까웠다. 아침 식사 하기 전에 빨리 다녀와야 하기 때문이다. '1시간 안에 다녀오려면 지금 바로 나가야 해. 지체할 시간이 없어. 이 정도의 눈은 괜찮겠지!'하고 스스로 맞장구를 치며 길을 나섰다. 왼쪽 언덕으로 나있는 길을 택했다. 언덕 위를 바라보니 잘 포장된 도로가 내 발걸음을 가볍게 해주었다. 포슬포슬 내리는 눈이 땅에 닿자마자 녹아버렸다. 참 다행이었다. 언덕을 오르며 만난 앙상한 나무 위에 하얀 눈 꽃이 피었다. 목화밭에 연신 눈이 내려앉았다. 


    언덕 꼭대기에 이르니 호계서원(虎溪書院) 입구가 보였다. 호계서원은 낙동강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 자리 잡은 안동 지방의 대표적 서원이다. 셀 수도 없이 많은 발걸음을 떠받쳤을 돌계단을 오르며  옛 정취를 느꼈다. 단아한 한옥의 까만 기와지붕과 담벼락에 내려앉은 하얀 눈이 어우러져 한 폭의 동양화가 되었다. 아침 산책길에서 만난 문우들과 사진도 몇 장 남겼다. 하얀 눈 속에 서 있는 우리. 하얗고 포근한, 그래서 춥지만 춥지 않은 아침 산책 길이었다.   

호계서원 [ 이미지: 류우강 기자]

    산책을 마치고 이동하여 간 곳은 이육사문학관이었다. 이육사(李陸史)의 본명은 이원록(李源綠)으로, 독립운동가이며 민족시인인 그는, 1904년에 나서 1944년까지 40년의 짧은 삶에서 20년 동안 조국의 광복을 위해 투쟁하다가 삶을 마쳤다. 그가 남기고 간 업적은 온 겨레의 민족혼으로 길이 길이 남으리라. 

 

           내 길을 사랑하는 마음, 그것은 나 자신에 

           희생을 요구하는 노력이오.

                ...... 

           행동은 말이 아니고,

           나에게는 시를 생각한다는 것도 

           행동이 되는 까닭이오.

 

                                                     - 이육사 수필  <계절의 오행>에서 (1938년)

 

      그는 시로써 행동하고 행동으로 시를 쓴 것이었다. 시인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는 묵념을 올렸다. 필명으로 쓴 '이육사' 는 그가 수감 중에 가슴에 달고 있던 수감번호였다. 그의 짧은 생에 17번의 수감 생활을 반복하면서 겪었을 옥고에 가슴이 저려왔다. 온 몸을 불태워 나라에 바친 시인의 시와 정신은, 그래서 더욱 우리의 가슴 속에 꺼지지 않는 불꽃으로 영원히 살아있다. 

 

    도산서원(陶山書院)은 퇴계 이황 선생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서원으로, 안동호가 바라보이는 언덕에 자리 잡아서, 가는 길은 더욱 운치를 자아냈다. 산세를 닮아 물빛은 연둣빛으로 물들었다. 손을 잡은 듯 산이 다정히 보이고 굽어진 소나무가 우뚝 서있는 곳에 '천광운영대(天光雲影臺) 안내판이 눈길을 끌었다. 산과 나무와 호수와 빛이 만들어낸 빼어나게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넓은 호수는 하늘과 구름, 산과 나무와 햇빛을 모두 넉넉하게 품고 있었다. 


    도산서원 입구에서 만난 산수유는 노란 꽃망울을 물고 때를 기다리고 있고, 먼저 온 매화가 수줍게 꽃망울을 터뜨리며 살포시 미소 짓고 있었다. 매화가 내게 조금 늦게 오지 그랬냐며 미안해 하는 듯했다. 도산서원에서 만난 매화 봉오리를 보니 이육사 시인의 <광야>  구절이 떠올랐다. 

 

        ...... 지금 눈 나리고 

        매화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호계서원 아침 길에서 만난 눈과 도산서원에서 만난 매화가 겹쳐 온다. 이육사가 만났던 그 날이 지금 여기 또 온 것이리라. 시간은 반복되어 역사를 또 반복시킨다. 매화는 혹독한 겨울을 이겨내고 꽃을 피워내듯이 냉혹한 현실 속에서도 꺾이지 않고 시련을 이겨내는 선비정신과 의지를 나타낸다. 

    

    한국정신문화의 근간이 되는 유학을 집대성한 퇴계 이황 선생(1502년 1월 3일-1571년 1월 3일)의 수많은 인재를 길러낸 도산서원, 계단 위로 올라 진도문 앞에 서서 한석봉이 친필로 쓴 도산서원 현판을 바라보았다. 곧고 굵은 선비의 기개가 느껴졌다. 발걸음이 닿고 닿아 모서리가 둥글어진 돌계단을 하나 하나 오르며 선조들의 숨결을 느껴본다. 


    도산서원 전교당典校堂은 스승과 제자가 함께 모여 학문을 강론하던 곳으로, 삼면이 시원하게 열려있어 뒷마당에서 내려다보이는 안동호(낙동강)가 그때나 지금이나 유유히 흐르며 민족의 정신을 이어주고, 뒤뜰의 오죽(烏竹)이 선비의 정신을 묵묵히 지키고 있다. 


    퇴계 선생께서 임종 전 미리 써 두셨다는 묘비명의 끝구절.

 

    ... 근심 속에도 낙이 있고 즐거움 속에도 근심이 있는 법이다. 

    조화造花를 따라 사라짐이여, 다시 무엇을 구하리오.  

 

                                                                                - 맹난자, <<주역에게 길을 묻다>>에서

     

    '근심과 즐거움이 따로 있지 않고 늘 함께하니 너무 염려치 말라'는 그 말씀을 가슴에 새겨둔다. 

    

    떠나가는 겨울이 아쉬워서 마지막 눈을 흩뿌릴 때, 매화는 봄을 부지런히 알리려 꽃봉오리를 쑥쑥 올리고 벌써 대여섯 송이를 터뜨렸다. 전날 밤부터 쉼 없이 내리던 눈이, 수줍게 꽃망울을 터뜨리는 매화와 자리를 바꾸며, 인사를 하는 듯 잠시 함께하다가 작별을 고하고, 나뭇가지에 앉은 눈만 남긴 채 이내 떠났다. 


    우리네 삶이 자로 잰 듯 딱 맞아 떨어지기 힘듦을 이 봄 날에 되새겨본다. 


    도산서원에서 만난 봄 속 산수유 꽃망울과 말간 얼굴을 쏙 내민 매화. 눈 속에 묻혀 고즈넉한 호계서원과 이육사의 깊은 애국정신과 희생정신, 이 나라 교육 및 사상의 큰 줄기를 이루고 만대의 정신적 사표가 된 퇴계 이황 선생의 큰 뜻을 가득 담은 뜨거운 가슴과, 그곳에서 문우들과 남긴 사진들, 모두 나를 찾아온 반가운 봄이었다. 

    

    그 모습 모두 카메라에 담았으니 올라오는 추억 보따리가 그득 찼다. 


    한동안 외롭지 않겠다.    

모두 봄이야 _ 김영희 [이미지 :류우강 기자]

    [수필 읽기]

 

    봄철이나 가을철이 되면 여러 문학단체에서는 문학기행이라는,  문학 작품의 배경이 되는 곳이나 작가의 생가를 방문하여, 작가와 작가의 작품을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한 여행을 떠나곤 합니다. 눈이 내리며 쌀쌀했던 봄철 문학기행에서 이육사문학관과 호계서원, 도산서원을 둘러 보는 여행은, 우리 민족의 정신을 가슴 깊이 되새기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문학기행을 다녀와서, 그곳에서 보고 느꼈던 기행문을 쓰면서 작가가 처했던 시대와 고민이 담긴 작품을 다시 읽어 봅니다. 

    

  이육사 시인은 1904년 5월 18일(음력 4월 4일)~1944년 1월 16일까지(퇴계 이황의 14대 손) 40년의 짧은 삶을 살며, 일제강점기 때인 1925년에 의열단에 가입하며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20년 동안 17번의 옥고를 치르며 독립운동가이자 시인으로 사셨습니다. 264는 1927년 독립운동으로 처음 수감되었을 때 받은 수감번호였고, 이후 필명으로 육사(陸史)라고 지었습니다. 이육사문학관은 현재 그의 따님이신 이옥비여사께서 관리하고 계십니다. '광야', '절정', '남한산성', '청포도'등 시를 발표하고 수필, 평론, 번역 등 왕성한 작품 활동도 하셨습니다. 광복을 불과 1년 앞두고 북경에서 모진 고문으로 그의 나이 39세에 옥중 순국하셨습니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애쓰셨던 많은 독립운동가분들과 호국영령들께 깊은 감사의 묵념을 올립니다. 이 나라를 보호해 주소서!

 

    퇴계 이황 선생께서는 태어난 이듬해에 부친을 잃고 스물일곱 젊은 나이에 상처했으며, 46세에 두 번째 부인과도 사별하셨습니다. 37세 때 모친상을 당했고 어린 아들마저 앞세우고 말았습니다. 69세에 생을 마칠 때까지 그 비통한 심정을 어떻게 견디며 사셨을 지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도산서원 양편 산기슭에는 절벽이 있는데, 퇴계 이황 선생은 서쪽 절벽을 '운영대 雲影臺', 동쪽 절벽을 '천연대天淵臺'라 불렀다고 하며, 운영대는 주자가 지은 <관서유감>이라는 시에 나오는 "하늘의 빛과 구름의 그림자가 함께 감도는구나" 라는 구절에서 이름을 지었으며, 천연대는 <<시경>>에 나오는 "솔개는 하늘 높이 날아오르고, 물고기는 연못에서 뛰노네"라는 구절에서 지었다고 합니다. 천영대와 운영대를 합하여 '천광운영대'라고 이름지어졌습니다. 

    

    지금의 안동호는, 경북 안동시 낙동강 상류에 건설된 댐으로 인해 안동호가 형성되었고, 안동댐은 1976년 10월 28일에 준공되어 농지에 농업용수를 공급하고, 부산과 대구 등에 생활, 공업용수를 공급하여 식량증산과 산업발전에 크게 기여하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월영교는 인기 많은 관광지가 되었습니다. 

 

    *퇴계 이황 선생의 묘비명 끝구절, 근심 속에 낙이 있고, 낙 가운데 근심이 있다. 

   

    *퇴계 이황 선생의 명언 : 고요히 마음을 가다듬어 동요하지 않음이 마음의 근본이다.

                심신을 함부로 굴리지 말고, 제 잘난 체하지 말고, 말을 함부로 하지 말라. 

                부귀는 뜬 연기와 같고 명예는 나는 파리와 같다. 

김영희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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