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하의 하루에 시 한 편을 202] 이철경의 "갱신"
갱신
이철경
괴물 같은 자본의 물결이 한반도에 광풍처럼 창궐한 지 여러 해
삶에 대한 회의를 느낄 만치
한 줌의 숨통을 연명하며 발버둥치다
썩은 미제 비스킷 같던 만료된 비자를 들고
재신청 서류와 하찮은 경력을 증명하고 통장을 까발리며
먹은 거, 싼 거 모두 다 드러내며 한 푼만 적선하소!
틈새 사이로 손 내민다
K1 선수처럼 째려보며 911테러나
119 구급차를 부를
사회부적응 자가 아닌지
창 너머 심사관 심각한 표정이 역력하다
하기사, 유엣쎄이던 쏘비엣트던
몸뚱이 하나 건사하기도 버거운데
광우병 걸린 명품 소처럼 미국산으로 둔갑한
송장 치울까 겁나기도 하겠지
알래스카든 히말라야든
어디로든 시원한 북쪽 나라로 가
머리 뚜껑 열어 젖히고
쩌엉― 쩌엉― 소리 울리는 찬물에 한동안 헹구어
햇빛 창창한 푸른 하늘
엷은 바람에 바짝 말려버리고 싶다
―『단 한 명뿐인 세상의 모든 그녀』(북인, 2013)

[해설]
미국이 우리의 우방인가?
최근에 여러 사람한테 들은 이야기다. 미국에 가야 하는데 비자 갱신이 안 되어 미국행을 포기했다는 것이다. 미국에서 대학 다니다 휴학을 하고 한국에 와 있다 학업을 마치기 위해 미국 가는 비자를 신청했는데 실패했다고 한다. 고등학교를 미국에서 나왔는데 한국에 온 이후 대입이 여의치 않아 미국의 대학에 가려고 비자를 신청했는데 거부당했다고 한다. 취업, 이민, 관광 등 모든 것이 어려워졌다는 것이 중론이다. 미국이 지리적으로도 먼 나라였는데 이제는 가는 것 자체가 어려워졌다. 트럼프가 대통령이 된 이후의 현상이다. 최근에 있은 엘지, 현대 공장 불법노동자 체포와 추방은 우리나라의 위신을 다시 생각케 한다. 우리나라는 미국의 우방이 아니라 변방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철경 시인은 어떤 한국인이 비자 갱신을 하는 과정에서 겪은 어려움을 이 시를 통해 토로하고 있다. 그런데 이 시를 쓴 시절에는 지금처럼 비자 받는 것이 어렵지 않을 때였다. 그때만 해도 웬만하면 다 갈 수 있던 미국을, 이 시의 화자는 무척 어렵게 준비를 마칠 수 있었다. 그런데 심사가 그때도 보통 까다롭지 않았다. 심사관 앞에 서면 바짝 긴장해 말이 잘 나오지 않았는데, 그때의 심사관은 그것을 이해해주는 편이었다. 지금은? 떠듬거리면 당연히 퇴짜를 맞는다. 이런 장면을 보니 ‘미국은 강국이고 우리는 약소국이다’, ‘미국은 상국이고 우리는 속국이다’라는 생각이 들면서 슬픔에 사로잡히게 된다.
우리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검사관 앞에서 “재신청 서류와 하찮은 경력을 증명하고 통장을 까발리며/ 먹는 거, 싼 거 다 드러내며” 용서를 비는 자세를 취해야 하는가. 조선조 때 박지원이 청나라 건륭제의 70세 생일을 축하하는 사절로 청나라에 다녀온 일을 적은 여행기가 『열하일기』였다. 조선조 때 동지에 명나라와 청나라에 보내던 사절 또는 파견된 사신을 동지사(冬至使)라고 했는데 이는 부끄러운 조공(朝貢)이라기보다는 조선조의 아주 교묘한 외교전략이었다. 지금 우리나라의 외교전략은?
지정학적으로 우리나라는 아주 불리하다. 북한은 중국과 러시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어서 유사시에 무기든 식량이든 바로 공급받을 수 있다. 유사시에 일본이 우리를 돕는다? 천만의 말씀이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되어 있지만 우리가 힘이 있을 때야 효력이 발휘될 수 있다. 사방을 둘러봐도 대한민국에 호의적인 나라는 없다. 그런데 “119 구급차를 부를/ 사회부적응 자가 아닌지/ 창 너머 심사관 심각한 표정이 역력할” 정도로 한국인을 얕잡아본다.
그래서 우리 모두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13년 전에도 미국 가는 게 쉽지 않았는데 지금은 열 배쯤 어려워졌다. 저 아메리카를 우리는 과연 믿어야 하는가? 돈 내놓으라고 큰소리를 치고 있는 저 힘센 나라를.
[이철경 시인]
1966년 전북 순창에서 출생하여 강원 화천에서 성장했다. 서울과학기술대 전자공학과와 고려대학교 대학원(문예창작 전공)을 졸업했다. 2011년 시 전문 계간지 《발견》에서 신인상을 수상하며 시인으로, 제3회 목포문학상 평론 본상과 2012년 《포엠포엠》 평론상을 수상하며 평론가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단 한 명뿐인 세상의 모든 그녀』『죽은 사회의 시인들』『한정판 인생』이 있다.
이승하 시인,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시집 『우리들의 유토피아』『욥의 슬픔을 아시나요』『생명에서 물건으로』『나무 앞에서의 기도』『생애를 낭송하다』『예수ㆍ폭력』『사람 사막』 등
평전 『청춘의 별을 헤다-윤동주』『최초의 신부 김대건』『마지막 선비 최익현』『진정한 자유인 공초 오상순』
지훈상, 시와시학상, 편운상, 가톨릭문학상, 유심작품상, 서울시문화상 등 수상
코리아아트뉴스 전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