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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강호의 시조 아카데미 20 ] 디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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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강호의 시조 아카데미 20 ] 디케

시인 김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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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케

김강호

 

 

신화를 걸어 나와 권력에 눈먼 여인

한쪽 귀 틀어막고 중심을 잃은 지 오래

움켜쥔 저울은 이미 악법 쪽으로 기울었다

 

썩어버린 정의에서 구더기가 기어 나오고

매몰된 자유에서 신음이 솟구친다

길 없는 벼랑을 향해 헛딛는 저 디딤 발

 

정적의 목을 치는 비릿한 칼날에서

수많은 비명소리가 천지사방 나뒹군다

오 저기 유권무죄와 무권유죄 판결이여

 

불의가 웃자라서 지상을 뒤덮을 때

긴 머리 휘날리며 천공에서 추락하는

디케여! 마녀 디케여! 악법의 딸 디케여!

 

디케  [ 이미지:류우강 기자]

 이 자리에 소환된 디케는 더 이상 저울을 곧게 세우는 정의의 여신이 아니다. 그녀는 "권력에 눈먼 여인"일 뿐이다. 저울은 기울어진 채 불의의 편에 선다. 여기서 저울의 기울어짐은 단순한 불균형이 아니라, 정의라는 추상적 이념이 현실 속에서 권력의 도구로 전락한 현상이다. 정의의 상징이 더 이상 정의를 담보하지 못할 때, '이데아의 그림자'가 더럽혀진 상태, 즉 본질과 현상의 괴리를 드러낸다.

 

시인은 디케를 통해 썩어가는 정의와 자유가 매몰된 상실의 역사를 보여주고 싶었다. 구더기와 신음은 더 이상 정의와 자유가 초월적 가치가 아님을, 그저 부패한 현실의 잔해로 남았음을 상징한다. 정의는 이상이 아니라 오히려 비극적 유해로 전락한 것이다.

 

"유권무죄, 무권유죄"라는 역설적 진술은 법의 형식과 정의의 내용이 완전히 분리되었음을 드러낸다. 법은 정의를 구현하는 도구가 아니라, 오히려 불의의 기계장치로 기능한다. 법은 진리를 드러내는 탈 은폐가 아니라, 오히려 은폐의 기술로 전락한다.
 

마침내 시 속의 디케는 추락한다. 그녀는 더 이상 정의의 신이 아니라 마녀이며, '악법의 딸'로 불린다. 이는 곧 정의라는 개념이 스스로의 신성성을 잃고, 권력의 폭력적 장치로 타락했음을 드러내는 상징적 추락이다.
 

이처럼 위 시 '디케'는 당당한 정의 앞에서 기울어진 저울을 바로 잡고 싶은 시인의 넋두리라 할 것이다. 

김강호 시인 
 

김강호 시인 

1960년 전북 진안 생 

199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조집 『당신 생각 소나기로 쏟아지는 날』외 다수

2024년 44회 가람문학상 수상 

고등학교 1학년 교과서 「초생달」 수록

코리아아트뉴스 전문기자

 

 

시인 김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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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강호시인#시조아카데미#디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