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에세이] 현대미술, 서양식 원근법 뛰어넘는 '소리의 공간' 창조
나의 붓질은 낡은 원근법의 종언이자 새로운 원근법의 시작이다. 앞의 사물과 뒤의 사물을 차갑게 분별하고, 과학적인 논리로 거리를 재어내는 서양의 원근법이 아니다. 동양의 깊은 사유에 뿌리를 둔 이 원근법은, 너와 내가 다르지 않다는 물아일체(物我一體)의 시선에서 출발한다.

빈 공간에 스며든 관세음(觀世音)의 미학
서양의 관점에서는 아득히 멀리 있는 사물을 앞으로 바투 당겨놓는 나의 다초점 화면이 낯설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마음속에서 더 무겁고 간절한 것이라면, 비록 물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다 한들 화면의 가장 깊은 중심으로 불려 온다. 이는 세상의 모든 소리를 눈으로 본다는 관세음(觀世音)의 자비를 화폭에 구현하는 일이다.
서양화에서 텅 빈 공간은 그저 비어있는 허공이지만, 동양의 붓질은 빈 것과 있는 것의 경계를 허문다. 내 그림 속 비어있는 여백은 결코 비어있지 않다. 그곳은 침묵이라는 이름의 소리로 가득 채워져 있다.
면과 선이 조우하며 만들어내는 틈새, 이전의 동양화가 선을 면 속에 스며들게 하여 공간의 깊이를 다루지 않았다면, 나의 선은 면 위에 겹겹이 포개지며 숨 쉴 수 있는 틈을 벌려낸다. 그 아득한 틈새마다 나의 벅찬 감동과 미세한 손떨림이 파장이라는 이름의 소리로 채워진다.
때로는 상형문자의 모습을 띠기도 하고, 때로는 허공을 가르는 춤사위가 되기도 하는 그 흔적들은 누군가를 설득하기 위한 객관적 기호가 아니다. 그것은 내밀한 영혼의 고백이자, 캔버스 위에 작가의 펄떡이는 생동감을 불어넣는 창조의 의식이다.

매트릭스에 갇힌 장인에서 세상을 앓는 예술가로
화가라는 숙명을 짊어졌다면 내면의 우물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창조의 두레박을 길어 올려야만 한다. 영화감독이 하나의 세계를 창조한 뒤 다음 작품을 위해 뼈를 깎는 고통을 기꺼이 감내하듯, 조형 예술가 역시 매 순간 자신을 허물고 새로 지어야 한다.
하지만 작금의 현실은 어떠한가. 고등교육의 세례를 받고 몇 번의 전시로 얄팍한 유명세를 얻은 화가들은, 어느새 한 번 성공했던 그림의 복사본을 찍어내는 서글픈 기계가 되고 만다. 자신이 쳐놓은 안락한 매트릭스에 갇힌 채 평생을 자기 복제의 늪에서 허우적거린다. 직업을 버리고 그곳을 탈출하지 않는 이상, 그 환상에서 깨어나기란 쉽지 않다.

르네상스의 거장 다빈치를 보라. 그는 이 달콤한 기만의 세계에 빠지지 않기 위해 쏟아지는 주문 생산을 단호히 거절했다. 낯선 호기심을 좇아 이탈리아의 고독을 자처했고, 후원자 하나 없는 쓸쓸한 발걸음으로 모나리자를 품에 안은 채 프랑스로 떠나야 했다.
오늘날 화가들은 얼마나 쉽게 스스로를 기만하고 있는가. 빨리 유명해지기를 갈망하고, 그 이름표에 기대어 낡은 그림을 공산품처럼 양산해 내는 이들을 우리는 예술가라 부를 수 없다. 그들은 그저 손재주 좋은 장인일 뿐이다.
장인이 예술가가 될 수는 있어도, 무의미하게 복제하는 자는 결코 예술가일 수 없다.
이 척박한 현대사회에서 진정한 예술가란, 지금 이 순간의 세상을 처절하게 앓아내며 그 눈물겨운 삶의 가치를 캔버스에 묵묵히 쏟아내는 사람이다. 매트릭스의 안락함을 박차고 나와, 세상을 껴안고 자신만의 문인화(文人畫)를 묵묵히 쳐내던 옛 선비의 서늘한 기개를 이제 우리가 다시 벼려내야 할 때다.

한명호(b.1957) 작가 소개
홍익대학교 서양화과 졸업
홍익대학교 대학원 서양화과 졸업
개인전
박여숙화랑, 박영덕화랑부산화랑, Q갤러리, 현대아트갤러리, 샘화랑 등
단체전
화랑미술제.(현대화랑), 북경아트페어(아트사이드갤러리) 외 다수
수상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최우수 미술가상
저서
보이지않는것을 보는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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