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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해설] 이선정의 "초록은 숱한 말들의 무덤이다"
문학/출판/인문
[ 이승하의 하루에 시 한 편을 ]

[시 해설] 이선정의 "초록은 숱한 말들의 무덤이다"

이승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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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하의 하루에 시 한 편을 108]

초록은 숱한 말들의 무덤이다

 

이선정

 

―췌장암 말기래

여름이 무슨 장난이니?

 

네게 건네지 못한 말들이

뜨겁게 쟁여진 며칠 밤을 건너며

나는 수천 조각의 언어를 부수어

마지막 인사를 찾는다

 

아름다운 친구 ㅇㅇ에게

살아서 미리 건네는 조의금 봉투

빈약한 문장만큼 납작한 입술이

이별로 부르터 있다

 

거짓말이지? 거짓말하지 마

믿기지 않던 처음 말과

아름다운 친구 ㅇㅇ에게

절망한 마지막 말 사이에

여름이 남긴 무성한 초록의 무덤이 있다

 

너의 민머리 위로 아직 슬픔이 자란다

웅크린 숲을 수시로 드나들면서

나는 여전히 침묵 중

 

눈물 보이지 말 것!

 

입술을 깨물며

별일 없는 듯 나부끼는

초록은 숱한 말들의 무덤이다

 

—『시와 징후』(2025년 여름호)

눈물  보이지 말 것 ! [ 이미지: 류우강 기자] 

 

  [해설]

   우리는 모두 죽는다

 

  이 글을 쓰고 있는 13일 저녁, 지인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그달에 축의금과 조의금 중 한 가지는 반드시 챙겨야 한다. 내 나이 어느새 인생의 종착역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뜻이다. 며칠 전에 무지외반증 때문에 병원에 갔는데 그 큰 종합병원에 웬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지! 층마다 빠글빠글하였다. 이 세상에는 아픈 사람들이 그만큼 많다는 것이리라.

 

  예전에는 겨울의 초입에서 연세 높은 분이 많이 돌아가셨는데 지금은 계절을 가리지 않고 연중 사망자가 나온다. 초록이 무성할 때인 지금 시점에도 많은 분이 돌아가신다. 장례식장이나 화장장, 납골당 같은 곳에 갔다 올 때 세상이 온통 초록색이면 참 아이러니하다. 그래서 이선정 시인은 초록은 숱한 말들의 무덤이다란 제목의 시를 쓰게 되었을 것이다.

 

  췌장암 말기란 진단은 사형선고를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내 어머니가 의사 선생님의 이 병 선언이 있고 딱 4개월 만에 돌아가셨다. 병원비에 보태라고 주는 돈은 사실상 조의금이다. ‘아름다운 친구 ㅇㅇ에게라고 겉봉에 글씨를 썼지만 화자는 친구의 죽음을 이미 예감하고 있다. ‘거짓말이지? 거짓말하지 마!’아름다운 친구 ㅇㅇ에게사이에 여름이 남긴 무성한 초록의 무덤이 있다가 자리하고 있다.

 

  화자는 친구의 목숨이 경각에 다다라 있음을 안다. 뭐라 해줄 말이 없다. 말을 해본들 거짓말이거나 거짓말에 가까운 췌언(贅言)일 것만 같다. 침묵을 지키게 되는데, 눈물을 보이면 병의 심각성을 알리는 것이므로 환자 앞에서 얘기도 자유롭게 할 수 없다. 제목이 마지막 연에 가서 한 번 더 나온다. 저 많은 초록 잎사귀들, 저 수많은 환자들, 망자들. 초록이 숱한 말들의 무덤이라 했을 때, 말은 언어일까 달리는 말일까. 아무튼 초록 빛깔에서 죽음을 데려온 시인의 역설적인 사고가 이 시를 빛내고 있다.

 

  [이선정 시인]

 

강원도 동해 출생. 중앙대학교 일반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석사과정 수료. 2016년 《문학광장》으로 등단. 2020년 강원문화재단 창작기금 수혜. 2023년 아르코 문학나눔 선정. 계간 『시와 징후』 편집위원. 시집 『치킨의 마지막 설법』, 『고래, 52

이승하 시인,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시집 『우리들의 유토피아』『욥의 슬픔을 아시나요』『생명에서 물건으로』『나무 앞에서의 기도』『생애를 낭송하다』『예수ㆍ폭력』『사람 사막』 등

 

평전 『청춘의 별을 헤다-윤동주』『최초의 신부 김대건』『마지막 선비 최익현』『진정한 자유인 공초 오상순』

 

지훈상시와시학상편운상가톨릭문학상유심작품상서울시문화상 등 수상

 

코리아아트뉴스 전문위원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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