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출판/인문
시 /시조

[김강호의 시조아카데미 32] 김강호의 "엔딩 크레딧 [ending credit]"

시인 김강호 기자
입력

엔딩 크레딧 [ending credit]

 

김강호

 

 

고막을 찢고 갔던 폭발음이 잠들었다

겨울에 눌려 있던 어둠의 잔재들을

하얗게 지우며 가는 소리가 흰 배경 음악

 

원본 끝에 매달려 분주하던 부록들을

잊지 않고 밀어 올리는 손놀림 빠른 자막

은사시 나뭇잎 같은 이름들이 반짝였다

 

뭉클하게 잦아드는 순간을 새김질하며

또렷한 진실 하나가 페이드 아웃[fade-out] 된 뒤

엔딩을 삼킨 화면에 늦봄이 스며든다
 

 5. 18 를 주제로 한 영화 '화려한 휴가' 스틸 컷 

 

이 시조에서 엔딩 크레딧 [ending credit]’은 단순히 영화의 끝 장면이 아니라 역사의 잔향을 정리하고 기억의 결을 다듬는 의식(儀式)으로 묘사했다.
 

첫 연의 고막을 찢고 갔던 폭발음5·18의 총성과 폭압을 떠올리게 하는 폭력의 기억이다. 그 소리가 잠들었다고 표현한 것은 사건이 끝난 것이 아니라 기억 속으로 잠시 내려앉아 정리되는 과정을 뜻한다. 이어 하얗게 지우며 가는 소리가 흰 배경 음악이라는 구절은 피의 역사 위에 희생을 위로하려는 애도의 정서가 배경 음악처럼 부드럽게 깔림을 암시한다. 하얀색은 눈과 겨울의 이미지로, 상처를 덮는 조용한 회복을 상징한다.

 

둘째 연에 나타난 부록들”, “손놀림 빠른 자막”, “은사시 나뭇잎 같은 이름들은 엔딩 자막을 구성하는 실제 사람들의 이름, 즉 역사에서 주목받지 못했으나 진실을 구성한 수많은 익명의 시민들을 가리킨다. 특히 은사시 나뭇잎이라는 비유는 바람만 스쳐도 흔들리는 여린 생명, 그리고 숲을 이루는 다수성을 동시에 함축한다. 거대한 사건은 몇 영웅이 아니라 수많은 개인의 흔들림과 상처 위에 서 있다는 인식을 드러낸다.


마지막 연은 엔딩의 감정선을 정리하며 기억 → 진실 → 새봄의 흐름으로 나아간다.

또렷한 진실 하나가 페이드 아웃 된 뒤라는 구절은 영화가 던진 메시지가 단순히 감정적 여운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본래의 진실을 드러낸 후 다시 삶 속으로 스며드는 과정을 표현한다. 엔딩이 삼킨 화면늦봄이 스며든다는 마지막 이미지는 섣부른 화해나 망각이 아닌, 기억을 통과한 뒤 찾아오는 성숙한 봄을 상기시키고 싶었다. ‘늦봄이라는 시기는 5·18의 계절성과도 겹치며, 상처가 기나긴 시간을 돌아 희망으로 변하는 길을 암시한다.

 

역사를 기억하는 일은 끝에서 비로소 시작된다는 메시지를 품는다.


엔딩 크레딧은 결말이 아니라 기억의 출발점, 그리고 남겨진 자들이 이어 써야 할 다음 장면의 시작임을 일깨우고 싶었다.

김강호 시인 

김강호 시인

1960년 전북 진안 생 

199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조집 『당신 생각 소나기로 쏟아지는 날』외 다수

2024년 44회 가람문학상 수상 

고등학교 1학년 교과서 「초생달」 수록

코리아아트뉴스 전문기자

 
시인 김강호 기자
share-band
밴드
URL복사
#김강호시인#코리아아트뉴스#시조아카데미#엔딩크레딧#시조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