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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하의 하루에 시 한 편을 ]

[이승하의 하루에 시 한 편을 335] 엄영란의 "살아났네"

이승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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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났네

 

엄영란

 

처음 구급차에 실려 복지사 도움으로 입원한

92세 할머니

 

열아홉 살 시집살이

호롱불 켜고

삼베 무명 길러 베틀에 옷감 짜서

명절 때면 밤새워 식구들 새 옷 짓고

육 남매 서울 울산 둥지 틀고……

겅중겅중 시계 다리 건너 꼿꼿이 걸어왔다

 

갑자기 하룻밤 사이

신경 통증 헤매다 지치고

낯선 간병인 손길

홀로 선 꼿꼿한 마음 생채기 입고

약물에 의지해 죽은 듯이 누워있다

 

늦게 도착한 중년 여인

코로나 검사 끝내고 어렵게 방문한 시골 병실

여인의 의아한 눈빛에

멍한 표정의 할머니

응급으로 입원한 정황 한참 얘기하더니

느닷없이 덧붙인다

 

삼밭 사자 이 빠지고 밍*밭 사자 눈 어둡다디

야가 올해 환갑 년, 박사 땄니데이 한다

 

듣고 있던 간병인의 말

이 할매 이제 살아났네, 하하하

 

*‘무명의 경상도, 전라남도 방언.

 

―『그렇게 살아가기』(코드미디어, 2022)  

살아났네 _ 엄영란 시인  [이미지:류우강 기자]

  [해설]

 

   곧 죽어도 자식 자랑

 

  코로나 시절의 일이니 2020년이나 2021년쯤인 듯하다. 92세 할머니가 몸은 병원 침대에 죽은 듯이 누워 있지만 치매가 온 것 같진 않다. 2연의 여섯 행은 구급차에 실려 복지사의 도움을 받아 병원으로 이송된 할머니의 생애가 잘 압축되어 있다. 열아홉 살에 시집가 육 남매를 두었는데 다 잘 컸나 보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낯선질병, 낯선 간병인의 도움으로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니 간병인이 실수라도 한 것인가? 코로나19 바이러스가 몸에 침범한 것인가?

 

  어떻든 늦게 도착한 중년 여인은 할머니의 딸이다. 딸은 코로나 검사를 끝내고 어렵게 시골 병실에 당도하였다. 여인은 의아한 눈빛으로 응급실로 입원한 정황을 한참 얘기하더니 삼밭 사자 이 빠지고 밍밭 사자 눈 어둡다는 속담을 덧붙인다. 할머니의 의식이 너무나 또렷하다. 이 속담의 원래 뜻은 제아무리 잘난 사람도 자기의 환경과 조건이 바뀌면 힘을 못 쓴다는 뜻이다.

 

  반대의 뜻도 가능하다. , 한 사람의 뛰어난 능력도 여건이 잘 받쳐줘야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이다. 터전과 환경이 사람을 만드는데 내 딸은 이제 환갑 년, 박사학위를 땄으니 앞으로 잘해 나갈 것이다. 내 딸의 성공을 지켜봐 달라는 자랑을 할머니는 간병인에게 하고 있다. 이 속담과 박사학위 운운을 듣고 간병인은 웃음을 터뜨리며 이 할매 이제 살아났네라고 말한다. 내일모레면 숨을 꼴깍 거둘지언정 여인은 그저 자식 자랑을 만방에 하고 싶다. 이게 엄마의 마음인 것이다. 엄영란 시인이 단국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니 자기 얘기가 아닌가 한다.

 

  [엄영란 시인]

 

  경북 예천 출생. 단국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졸업(문학박사). 계간 《문파》 시ㆍ수필 부문 신인상 당선. 한국수필가협회 이사, 한국여성문학인회 회원. 창시문학상, 시계문학상 수상. 시집 『그리움, 이유』『그렇게 살아가기』, 공저 『문파대표시선』『바람의 붓끝은』 외 다수. 동요 작사곡 다수.
 

이승하 시인,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이승하 시인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시집 『우리들의 유토피아』『욥의 슬픔을 아시나요』『생명에서 물건으로』『나무 앞에서의 기도』『생애를 낭송하다』『예수ㆍ폭력』『사람 사막』 등

 

평전 『윤동주-청춘의 별을 헤다』『최초의 신부 김대건』『마지막 선비 최익현』『진정한 자유인 공초 오상순』

 

지훈상, 시와시학상, 편운상, 가톨릭문학상, 유심작품상, 서울시문화상 등 수상

 

코리아아트뉴스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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