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소개] 황주현 시집,『나는 나를 조립 중이다』

책 소개
아토포스, 흩어진 삶의 조각들
2020년 《시인시대》로 등단한 황주현 시인의 첫 시집 『나는 나를 조립 중이다』가 시인동네 시인선 280으로 출간되었다. 시인의 언어는 무력한 기억에 의미를 각인하는 도구다. 찰나의 순간을 과시하고 나열하기를 반복하는 것이 일상이 된 세계에서 황주현의 시는 성급한 분장술로는 가릴 수 없는 지질한 삶의 풍경을 제시한다. 그러면서 시는 아픈 질문으로 진화한다. 당신의 구성하는 기억과 일상, 당신의 입구와 출구는 무엇인가. 속도를 추구하는 세계를 향한 갈등과 분노를 담지 않고도 이 질문은 아프게 다가온다. 황주현의 시를 읽는 독자들은 물끄러미 낡은 골목의 풍경, 계절의 변화, 사물과도 같았던 이웃의 삶이 눈에 들어오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전시와 과시를 미덕으로 삼는 세계에서 점차 외로워지는 당신에게 이 시집을 권한다.
시인의 말
그늘 속에 한 계절이 들어왔다 나가는 동안
나는 얼마나 무사한 절망의 덩어리들을 견뎌왔던가.
내 앞에 놓여 있는 이 무사한 자국들.
막막하기만 했던 폭염도, 혹한도 모두 잠결이었다고,
반쯤 열린 대문 밖을 훅 지나가는 나의 발걸음도
어떤 감각의 덩어리였다는 사실,
참 다행한 일이다.
2026년 7월
황주현
해설
황주현의 첫 시집 『나는 나를 조립 중이다』를 읽는 독자들은 어떤 사람의 삶-풍경과 마주하게 된다. 황주현의 시적 주체는 낡고 불완전한 기억을 끊임없이 소환한다. 그 기억은 그의 삶을 설명하는 자잘한 오브제다. 기억을 더듬는 자는 대개 자신의 삶을 쓸쓸하게 조망한다. 반복과 규정 그리고 타인의 시선, 이것은 일종의 굴레와도 같다.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면서 특정한 이름을 부여받고, 자신의 의지와는 달리 누군가와 혈육으로 연결된다. 성별, 재산, 학력, 계층, 종교 등 한 사람을 규정하는 세상의 기준은 실로 정교하고, 집요하다. 사내는 그러한 질서에 순응하지 않는다. 그는 “의무적으로 부류나 계층에 소속”되기를 거부한다.
내 이름은 어떤 사람이다. 세상의 작명소에서 넙죽 받아 든 어떤 사람, 의무적으로 부류나 계층에 소속돼버린 어떤 사람, 부끄러웠던 족보를 과감히 벗어던진 어떤 사람, 똥배도 밑천이 돼버린 어떤 사람, 홀씨보다 더 가벼워져 풀씨처럼 어디서나 누울 수 있는 어떤 사람, 관심 밖에서 자유로운 어떤 사람은 공터 근처나 건물과 건물 사이, 가늘고 긴 하늘이 구름다리처럼 놓여 있는 골목 끝에 자주 꽁초로 발견된다. 나를 찾으려면 나에게 먼저 의뢰해야 한다. 내가 분실되었다면 나는 나와 공범이다.
― 「어떤 사람」 부분
부끄러운 족보로부터, 그리고 세상의 관심으로부터의 자유롭기를 희구하는 사내가 응시하는 것은 주로 낡고, 초라한 공간이다. 그가 응시하는 곳은 이를테면 ‘못 자국이 많은 오래된 집’(「고정의 힘」), ‘빗물이 누수되는 옥상’(「옥상이라는 것」), ‘만원 지하철’(「순응의 냄새」)과 같은 곳이다. 그 공간들을 배회하면서 ‘나’는 초라하고 가난한 삶의 풍경들을 떠올린다. 그곳에는 고단한 노동과 초라하고 낡은 것들의 비애가 가득하다. 그는 오래된 집의 “끈질기게 달라붙은”(「고정의 힘」) 못 자국을 보면서 그곳에 머물던 사람의 고된 삶을 반추하고, 옥상에서는 “스티로폼 박스 안에 푸른 화단”(「옥상이라는 것」)을 가꾸며 여름 별들을 위안 삼는 사람을 떠올린다. 사내는 왜 이러한 공간들을 배회하는가. 그는 중력과 맞서며 맺히는 열매를 보면서 이렇게 적는다.
누구나 가장 큰 무게로 땅을 딛고 살아들 가지만
오르는 일을 만나면 그때부터
더욱더 무거운 사람,
자신의 무게를 온전히 깨닫는 사람이 된다
가장 무거울 때, 떨어지는 일은 치욕이 아니라 열매들의 착지 방법을 따랐을 뿐이다 아무리 가벼운 먼지들이라 해도 결국에는 저의 무게로 떨어지고 고요의 겹겹이 된다
스스로의 무게를 견딘 열매들은
자신이 경험한 높이의 나무가 된다
― 「암벽」 부분
사내의 응시는 풍경의 관찰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그의 시야에 들어온 풍경들은 타인의 삶이지만 그의 과거와 현재와도 겹쳐진다. 시적 주체인 사내는 거친 노동을 하면서 고단한 밥벌이를 영위한다. 세상의 기준은 직업과 재산, 거주지, 혈연 등으로 사람들을 분류하고 파악하려고 하지만 그는 줄곧 살아 있는 것들의 유한한 삶이 담긴 풍경을 바라본다. 그의 시선에 포착되는 것은 이렇다. 분명히 존재하지만 부정당하는 것. 밝고 화려함을 강조하는 세계에서 소외된 홀대받는 것들. 가치와 가격으로 지위가 결정되는 세계에서 가치를 측정하기 어려운 것들. 이를테면 계절의 변화, 햇살, 골목에서 마주한 고양이, 식물의 조용한 생존 투쟁, 거주자의 흔적이 남은 오래된 집이다. 그는 나약하고 끈질기지만 소외된 것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생명을 가진 모든 것들의 운명을 자각하고, “누수가 되는 오후의 햇살”(「웅크린 온도」)와 “누군가 주저앉았던 흔적”(「무거운 사람」)을 보면서 역시 점차 낡아가는 자신을 발견한다. 소멸과 유한성에 이르는 것들의 개별적인 삶이 소거된다면 밝고 화려함으로 덧칠된 세계는 다만 찰나의 풍경에 지나지 않는다. 이를테면 황주현의 시적 주체들이 응시하는 풍경들은 일상을 전시하는 SNS에 올릴 ‘셀카’ 사진으로는 적합하지 않다. 다들 기꺼이 자신의 일상을 전시하는, ‘관종’들이 장악한 세계에서 시인이 포착한 풍경들은 한없이 초라하기만 하다.
― 이정현(문학평론가·한국외대 교수)
책 속에서
당신을
반쯤 열린 나의 출구이거나 입구라고 여기던 날들이 있었다
그리하여 나는 당신을 통과해 여기까지 왔다
이만큼 왔으니
또 그만큼은 가야 한다고 말해서 좋다
반쪽을 생각하면 꼭 적도의 날씨를 떠올리는 일 같아서
그곳의 사람들이 쓰고 다니는 모자 같아서
가보지 않은 반쪽은 사실 그 어디에도 없다고
당신이 내게 말해서 좋다
― 「반쪽을 보는 일」 전문
정 가까운 시간
공구를 사러 온 남자가 있었다
그가 손에 집어 든 건 잔뜩 어둠의 잔해가 묻은 커다란 망치였다 남자의 깊고 퀭한 눈빛에
고장 난 가로등 불빛이 잠깐 다녀갔다
아주 잠시 무거워져서 한밤에 망치의 쓰임새를 생각했다
어느 밤하늘에 꽝꽝 대못을 박으려 했을까 그 칠흑의
널빤지와 각목 한쪽이 펄럭거리고 들춰지고 있을까
밤은 너무 넓고 광대해서 어느 곳 손을 좀 본다 해도
별들이 허술하게 물 새듯 쏟아지는 세상에
도대체 밤의 어느 행성 하나를 고치려고 하는지
아니면 덜컹거리는 자기의 무릎관절을 제대로 붙들어 매려고 하는지
남자는 망치를 오래 만지작거렸고 망치를
계산하는 동안 나의 캄캄한 명치 끝에서
고치지 못하고 방치한 것들을 두드리는 망치질 소리가 났다
못 하나로도 수리할 수 없는 의심이 풍파를 만드는 밤
겨우 망치 한 자루 팔고 건넸을 뿐인데
너무 광대한 수리가 필요한 일들을 생각했다
공구점의 자동문이 닫히고 공구 상자마다 어둠을
채워 넣은 뒤에 나는 망치를 든 그의 손이 골목으로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한밤의 공중에서 잘못 박힌 대못들이
기다렸다는 듯 한꺼번에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고장 난 우주 한 귀퉁이가 정비되고 있는 듯
막 구름 속으로 달이 들어가고 있었다
― 「한밤의 공구점」 전문
우리 마을에서 가장 무거운 사람은
목수 최 氏입니다
최 氏는 수시로 망치를 사용합니다
망치를 든 오른팔은 왼팔보다 조금 더 깁니다
망치를 들고 있을 때의 최 氏는 눈빛이 울퉁불퉁합니다
쇳소리가 몸속에 가장 많이 쌓여 있어
무게로 따진다면 최 氏는 그중 제일 무거운 사람입니다
깊이에 대해,
깊이를 파고들고 남은 부위에 대해서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못 하나로 집을 지을 때도 그 못 하나로
집을 허무는 일까지를 염두에 둡니다
그러니 속내와 표면에 대해선
최 氏에게 물어야 합니다
때리는 힘과 파고드는 속도
어떤 말이 휘어지지 않는지, 쉽게 구부러지는지
또 어떤 말이 망치를 이겨 먹는지
최 氏는 알고 있습니다
언젠가 나도 최 氏에게 휘어지지 않는 말을
얻어 온 적이 있습니다
망치를 내려놓아야 박혀 있는 말을 뺄 수 있다고 했습니다
굳이 박지 않아도 말은 상처가 되어
피 흘린다고 했습니다
믿지는 않지만 누군가는
최 氏가 울 때
땅땅 망치 소리를 낸다고 합니다
― 「목수 최 氏」 전문
암전은 어딘가를 켜야 하는 일이다
아버지가 늙고
촛불이 일렁이는 밝기처럼 어머니가 늙었다
어둠이 들었다 나오면
그 사이 턱엔 거뭇하게 암전의 흔적이
돋아나듯 묻어 있었다
가끔 친구가 와서 낡아빠진
암전을 주고 환한 순간을 바꿔 갔다
암전의 곳곳을 익혀야 했다
배역이 바뀌고 줄거리가 끝이 난 몇몇 친구들
모두 암전 한 벌씩 걸치고
겨우 눈꺼풀 속에 어둠을 감추는 법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무대에서의 암전은 늘 발이 빠르다
집 한 채가 뚝딱 세워지고
젊은이는 고스란히 늙은이가 되고
관객석의 그들처럼 어깨가 구부정해 있다
암전보다 더 확실한 분장술은 없다
모두 서로를 알아보지 못했다
덜 깬 어둠이 지팡이를 짚고 문을 더듬거리고 있다
화살표가 없는 암전은
공복 상태로 지금도 대기 중이다
― 「암전」 전문
나무들에게 죽음이란
울창한 그늘을 잃는 일
종종 햇살도 유리처럼 깨지는
죽은 나무 아래 죽은 그늘
봄도 여름도 겨울도 같은 계절로 분류되는
나무라는 묘지들
그런 묘지를 뚫고 아직 살아 있는 벌레를
파내어 먹는 새들
냄새도 없이 오래 지속되는
나무들의 부패,
혹은 뷔페
― 「나무라는 묘지」 전문
시인의 말
‘부재’와 ‘결핍’이라는 말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언제부턴가 세상의 모든 ‘수평’이 삐딱하게 보이면서부터다. ‘나’라는 사람의 구조와 원리는 애초에 삐딱했으므로. ‘의미 있다’ 보다는 ‘의미 없다’를, 더 나아가 ‘불편함’과 악수를 청하면서 내 무게의 중심과 회로는 궤도를 이탈하지 않았다. 참 다행인건 하루하루는 불안했지만, 여러 날은 안전했다. 낮고 그늘진 곳을 풍경이라고 말하면서도 부끄럽지 않을 수 있다니. 어차피 세상 앞에 떳떳하지 못할 일들은 비유와 은유로도 조립이 불가능함으로, 그래서 과감하게, 나는 나를 해체하기로 했다.
작가 프로필
황주현 시인
경북 안동에서 태어나 2020년 《시인시대》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24년 《경상일보》, 《경남도민신문》 신춘문예 당선했으며, 제1회 〈안동문화상〉 시 부문을 수상했다.
[출처] 시인동네 시인선 280, 황주현 시집,『나는 나를 조립 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