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전시 평론] 어둠을 품는 표면, 스며듦의 에티카_ 《한지와 민화의 만남》
![한지와 민화의 만남 홍보 이미지.[캐나다한국문화원]](https://koreaartnews.cdn.presscon.ai/prod/125/images/20260811/1786397010740_197590192.jpg)
캔버스를 넘어선 한지의 시간
빛은 어둠을 몰아내야 할까. 아니면 어둠의 곁에 머물며 함께 존재하는 법을 보여줄 수도 있을까. 주캐나다 한국문화원 전시실에서 한지를 마주하는 순간, 익숙했던 질문 하나가 새롭게 다가왔다. 한지는 단순히 그림을 그리는 종이가 아니다. 빛과 어둠, 전통과 현대, 고향과 이국을 이어주는 살아 있는 매체다.

기획전 《한지와 민화의 만남》은 전통 재료와 민화의 결합을 내세운다. 하지만 전시장에 들어서면 이 단순한 설명만으로는 작품을 다 담아낼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승철 작가가 기획하고 김강미, 김선희, 김수미, 남정은, 윤수경, 이희진, 임진성 등 여덟 작가가 참여한 이번 전시는 민화를 과거의 양식으로 묶어두지 않는다. 작가들은 한지와 천연 안료가 지닌 오래된 감각을 오늘의 언어로 다시 풀어낸다.

한지는 처음부터 ‘그림을 받쳐주는 바탕’에 머물지 않는다. 닥나무 껍질을 벗기고, 삶고, 두드리고, 물에서 건져 올리는 긴 과정을 거쳐 한 장의 종이가 된다. 그 안에는 닥나무의 섬유와 자연의 흔적, 종이를 만든 사람의 손길이 함께 남는다. 한지를 본다는 것은 그림만 바라보는 일이 아니다. 종이 한 장에 쌓인 시간과 손의 기억을 읽는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한지는 얇지만 가볍지 않다. 그 표면은 비어 있는 흰색이 아니라, 수많은 시간이 겹쳐진 ‘시간의 피부’에 가깝다.
민화와 한지가 만났을 때
민화는 오랫동안 제도권 미술의 바깥에 있었다. 이름난 화가의 작품이라기보다 이름 없는 화공들의 손을 거쳐 만들어졌고, 한 장의 원본보다 반복과 변형을 통해 널리 퍼졌다. 그런 점에서 민화는 조선시대의 대중문화이자 생활 속 이미지였다.
호랑이와 까치, 책거리와 달항아리 같은 도상은 현실을 그대로 재현한 그림이 아니다. 사람들이 바라는 세계를 담은 상징에 가깝다. 호랑이는 두려운 존재이면서도 익살스러운 모습으로 그려지고, 책거리는 지식과 출세에 대한 소망을 품는다. 민화는 그렇게 일상의 욕망과 바람을 솔직하게 드러냈다.

이번 전시에서 흥미로운 지점은 이 익숙한 이미지들이 한지의 표면을 만나 전혀 다른 감각을 만들어낸다는 데 있다. 화면 속에서 보던 상징이 한지의 거친 결을 입는 순간, 민화는 눈으로만 보는 이미지가 아니라 손끝으로 느끼는 이미지가 된다. 민화가 “무엇을 바랄 것인가”를 묻는다면, 한지는 “그 바람을 어떤 감각으로 경험할 것인가”라고 되묻는 셈이다.
한지 부조 연작은 이러한 만남을 더욱 분명하게 보여준다. 〈달항아리〉, 〈예수상〉, 〈반닫이〉, 〈성모마리아상〉처럼 서로 다른 문화와 종교에서 비롯된 이미지들이 한지 위에 나란히 놓인다. 이 작품들 앞에서는 동양과 서양, 세속과 성스러움이라는 구분이 자연스럽게 느슨해진다.
특히 서양의 성상 이미지가 한지의 질감을 입었을 때, 그것은 더 이상 낯선 전통의 상징으로만 남지 않는다. 한지의 따뜻하고 거친 표면은 그 이미지에 새로운 온기를 더한다. 평면과 입체 사이에 놓인 부조는 빛을 완전히 반사하지도, 그대로 통과시키지도 않는다. 그 모호한 경계가 오히려 서로 다른 문화가 만나는 방식을 보여준다.
손끝으로 배우는 기다림
이번 전시의 체험 워크숍은 작품을 눈으로 감상하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관람객은 한지를 직접 만지고 붙이며, 작가들이 탐구한 매체의 특성을 몸으로 경험한다. 특히 초롱등 만들기 워크숍은 한지의 세계를 가장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한지는 서두르는 손을 좋아하지 않는다. 풀이 너무 많으면 종이의 결이 무너지고, 부족하면 제대로 붙지 않는다. 손끝에 조금만 힘을 달리해도 결과가 달라진다. 결국 필요한 것은 기술만이 아니라 기다림과 집중이다.
스마트폰 화면을 빠르게 넘기는 데 익숙한 손가락도 한지 앞에서는 느려진다. 종이를 다독이고, 풀이 마르기를 기다리고, 작은 틈을 살피는 동안 관람객은 평소와 다른 시간 속으로 들어간다. 즉시 보고, 즉시 판단하고, 곧바로 다음 이미지로 넘어가는 시대에 한지는 잠시 멈추라고 말한다.
완성된 결과보다 붙이고 스며드는 과정이 중요해지는 순간이다. 한지는 속도가 빠를수록 좋은 것은 아니라고, 때로는 천천히 머무는 일이야말로 무언가를 제대로 만나는 방법이라고 알려준다.
어둠을 밀어내지 않는 초롱
초롱에 불이 켜지는 순간, 전시장 안의 분위기는 조금 달라진다. 형광등 아래에서는 희고 얇게 보이던 한지가 안쪽의 빛을 부드럽게 받아들인다. 닥섬유의 결은 은은하게 살아나고, 나무 뼈대의 그림자는 벽에 조용한 무늬를 만든다.
이때 초롱은 단순한 공예품을 넘어선다. 그것은 어둠을 몰아내는 강한 빛이 아니라, 어둠과 나란히 존재하는 빛을 보여준다.
한지 한 겹 사이로
어둠과 살을 맞댄 밤
거친 나무 뼈대가
검은 모서리를 받아내고 있다
그 틈으로 번지는 빛
빛이라기보다
오래 참아온 숨 하나
천천히 풀려나오는 것 같다
어둠을 밀어내지 않는다
제 몸에 그늘을 받아들인 채
지친 발끝의 흙마저
그 온기로 감싸안는다
바람이 와 벽을 흔들고 지나가도
초롱은 제 그늘을 끌어안은 채
마디마디 밝아온다
이 시에서 초롱은 완벽하게 밝은 세계의 상징이 아니다. 오히려 빛과 그늘이 함께 있을 때 생기는 온기를 보여준다. 빛은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어둠을 없앨 필요가 없다. 한지는 빛을 받아들이고, 부드럽게 걸러내며, 그 안에 그늘까지 품은 채 바깥으로 내보낸다.
이 장면은 오타와라는 장소와도 자연스럽게 겹쳐진다. 천 년의 역사를 지닌 한지가 다문화 사회인 캐나다에서 낯선 사람들의 손을 거쳐 초롱으로 다시 태어났다. 전통은 박물관 안에 고정되어 있을 때만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다른 문화와 만나고, 새로운 시선 속에서 번역되고, 때로는 낯선 방식으로 변할 때 오히려 생명력을 얻는다.
이민자의 삶이 떠오르는 것도 그 때문이다. 낯선 땅에 뿌리내린다는 것은 과거의 정체성을 지우는 일이 아니다. 새로운 환경의 빛을 받아들이면서도, 오랫동안 간직해온 자신의 결을 잃지 않는 일이다.
어쩌면 이민자의 삶은 한지 초롱과 닮았다. 고향의 빛만을 고집하지도 않고, 새로운 땅의 어둠을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두 세계 사이에서 자신의 몸을 조금 낮추고, 안팎의 빛과 그림자를 모두 받아들이며, 자신만의 은은한 불빛을 지켜간다.
어둠 속에서 함께 밝아지는 법
천 년의 시간을 건너온 한지는 오타와에서 다시 빛을 얻었다. 그 빛은 과거로 돌아가자는 복고의 빛이 아니다. 오래된 물성과 기억을 품은 채, 동시대라는 새로운 바다를 건너가는 빛이다.
《한지와 민화의 만남》은 전통을 그대로 재현하는 전시에 머물지 않는다. 한지는 서구 미술이 오랫동안 중심에 두었던 캔버스의 개념에 조용히 질문을 던진다. 표면은 정말 비어 있어야 하는가. 재료는 작품을 받치는 역할에만 머물러야 하는가. 이 전시는 한지가 하나의 기억이자 시간이며, 감각을 가진 주체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전시장을 나서며 오래 남는 것은 화려한 이미지보다 한지의 결이다. 그 결은 우리에게 말하는 듯하다. 문화란 어둠을 몰아내는 정복의 방식이 아니라, 제 몸에 그늘을 받아들인 채 그 안에서 함께 살아갈 작은 온기를 만드는 일이라고. 그리고 그 온기는 거창한 선언보다 조용한 초롱 하나의 모습으로 오래 빛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