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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희의 수필 향기] 말없는 기둥 - 서순옥

수필가 김영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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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년을 살아온 집. 몸이 익숙하고 마음이 익은 집이 언제부턴가 제 나이를 감추지 못하고 있다. 욕실 벽의 타일은 군데군데 실금이 보이고 부엌 씽크대 문짝 하나가 삐걱거리더니 아슬아슬 붙어있다. 베란다 출입 문틀은 닳아 흰 페인트가 벗겨져 나무 색깔이다.  거실 벽지는 주름지고 누렇게 늙어가는 내 얼굴을 닮았다. 이참에 리모델링을 해볼까 차라리 이사를 할까 생각이 많았다. 동네 지인과 이웃 지역에 분양을 하니 가보자고 약속까지 잡았다. 

  

  여러 날 고민하다 이사는 접었다. 새로운 것을 원하는 마음과 이 낡은 집에 머무르고자 하는 마음이 쉴 새 없이 충돌했다. 이 집은 단순히 벽과 천장으로 이루어진 구조물이 아니다. 이곳은 나의 삶을 담은 그릇이었다. 이 집에 오기 전 어느 날 갑자기 남편이 쓰러졌고 그렇게 우리 곁을 떠났다. 분양 받아 놓고 함께 꿈꾸던 미래를 펼쳐보기도 전에 혼자서 세 아이들 데리고 이 집에 들어왔던 날이 잊히지 않는다. 커튼도 달지 못한 텅 빈 공간이 낯설었다. 동네도 낯설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무도 나를 대신해줄 수 없는 고단하고 조용한 싸움의 시작이었다. 앞으로는 내가 이 집의 기둥이어야 한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마흔 두 가구의 입주가 시작되자 반상회가 열렸다. 위아랫집도 앞집도 알게 되고 고향이 같은 또래도 만나게 되었다. 산악회도 만들어 친목을 도모했다. 점심이면 밥을 나누어 먹고 형님 동생하며 세월을 보냈다. 이웃들이 늦게야 내 사정을 알게 되었다. 열심히 잘 살고 있다며 애잔하게 등을 토닥여 주었다. 멀리 있는 형제보다 가깝게 지내다 보니 외로울 틈도 없이 살았다. 그들은 나를 성당으로 인도했다. 아이들과 함께 세례도 받고 신부님 강론에 많은 위로를 얻었다. 

 

  세 아이들은 다행히 배우자를 만나 둥지를 틀고 모두 내 곁을 떠났다. 손주가 다섯이 되었다. 지금 생각해도 어떻게 혼자서 세 아이들 결혼식을 올렸는지 아스라이 지난날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들이 큰 힘이었다.

 

  같은 단지에 살았던 이웃들이 이사를 갔지만 여전히 나처럼 살고 있는 집도 있다. 윗집 형님은 다른 곳으로 가지 말고 오래도록 같이 살자고 전화로 안부를 물어 올 때도 있다. 엘리베이터에서 눈 인사를 나누고 시장 골목에서 만나면 "오랜만이에요."하고 말을 건네는 얼굴들. 김장김치를 건네주고, 병원에서 퇴원하고 돌아왔더니 열무김치 한 통을 현관 앞에 놔두고 간 말 없는 정이 오고 갔다. 

  

  누군가는 말했다. 요즘 아파트는 벽이 많고 마음도 없고 쓸쓸하다고 하지만 그들의 손길이 나를 지켜주었다. 그뿐인가. 성당 식구들, 적십자에서 봉사로 만난 회원들, 어떤 날은 나보다 더 나를 걱정해주는 따뜻한 사람들이 내 삶의 무게를 조금씩 덜어주었다. 나는 이 집안에서만 사는 게 아니라 이 집을 둘러싼 사람들과 함께 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이 집을 떠날 수 없다. 세월이 흘렀지만 이 집에는 내가 살아낸 시간이 있고 그 시간 안에는 사람들의 온기가 남아있다. 나는 그 온기를 디딤돌 삼아 지금까지 살아왔다. 떠나지 못하는 이유를 묻는다면 나는 망설임 없이 "사람 때문이에요."라고 말할 것이다. 삶은 결국 사람으로 이어진다. 좋았든, 서운했든, 따뜻했든 내 곁에 스며든 사람들과의 기억이 나를 이 자리에 머물게 한다. 

 

  이제는 새로운 시작보다 익숙한 곳에서 마무리를 준비하는 시기다. 이 집은 내 인생이었다. 이 동네는 내가 맺은 사람들과의 숲이었다. 나는 그 숲에 뿌리를 내리고 조용히 살아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정이 묻어 나고 관계가 살아있는 이곳에서 살다가 내 인생을 잘 마무리할 수 있다면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을 것 같다. 

 

  결국 나를 지탱해준 것은 화려한 변화가 아니었다. 나를 버티게 해준 것은 이 집의 벽도 지붕도 아니었다. 언제나 한 발 물러서 있었지만 그들의 무심한 듯 따듯한 눈빛, 말 없는 기척이었다. 이 세월을 견디게 한 것은 소리 없이 받쳐주던 존재들, 기둥 같은 사람이었다. 

 

- 서순옥의 '말 없는 기둥'   

서순옥의 '말 없는 기둥' [이미지: 류우강 기자] 

  [수필 읽기] 

 

  작가는 지금 살고 있는 곳을 떠나지 못한다. 비록 집은 낡았지만 그곳에서 지냈던 많은 일들로 추억이 서린 그 집은, 그녀가 결혼 후 남편을 잃고 세 아이를 키우며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준 많은 사람들과 연결된, 그녀의 인생이 되어 주었기 때문이다. 
 

  남편을 갑자기 잃고 세 아이를 키워 결혼 시키기까지 수많은 삶의 여정을 함께한 그 집을 떠날 수 없는 그녀. 힘들었을 그녀를 쓰러지지 않도록 붙잡아 주고,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어주며 도와준 이웃들과의 애잔한 관계 속에서, 함께 웃고 울었을 그 시간들을 결코 잊을 수 없고 떨쳐버릴 수 없는 것이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혼자 남은 어머니가 걱정되어 "저희 집에서 같이 사세요."하고 말씀드렸다. 어머니는 아파트에서 살면 사람들 사귀기가 어렵고 답답하시다며,  오랜 기간 살아오신 그곳의 이웃들과의 관계와 익숙하고 정이든 그 거리를 떠날 수 없으셔서, 그동안 살아오신 집에서 그냥 사시겠다고 하셨다. 걱정이 되었지만 어머니께서 원하시는 대로 해드렸고 자식들이 자주 찾아뵙는 거로 약속을 했다. 
 

  언제든 자주 보고 인사 나누며, 서로 가진 것을 나누며 사는 이웃들. 지금은 자식의 자식, 손주까지 낳고 살고 있는, 3대가 이어지는 이웃들의 모습은 다른 어느 곳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모습들이다. 

  

  결국 모든 것은 "사람의 문제"다. 사람 때문에 살고, 사람 때문에 웃고, 사람 때문에 울고, 사람 때문에 모든 걸 걸기도 하고, 사람 때문에 모든 걸 포기하기도 한다.  

 

  함께 하고 싶은 사람, 같이 이야기 나누고 싶은 사람, 같이 밥을 먹고 싶은 사람, 같이 시간을 보내고 싶은 사람, 같이 영화를 보고 싶은 사람. . . . . .  

 

  누군가에게 '같이 ......하고 싶은 사람'이 되고 싶다. 

김영희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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