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강호의 시조 아카데미 23] 박시교 "나의 아나키스트여"

나의 아나키스트여
박시교
누가 또 먼 길 떠날 채비 하는가 보다
들녘에 옷깃 여밀 바람 솔기 풀어놓고
연습이 필요했던 삶도 모두 다 놓아버리고
내 수의(壽衣)엔 기필코 주머니를 달 것이다
빈손이 허전하면 거기 깊이 찔러 넣고
조금은 거드름 피우며 느릿느릿 가리라
일회용 아닌 여정이 가당키나 하든가
천지에 꽃 피고 지는 것도 순간의 탄식
내 사랑 아나키스트여 부디 홀로 가시라

박시교의 시〈나의 아나키스트여〉는 죽음을 종말이 아닌 해방의 여정으로 그린 작품이다. 화자는 삶의 마지막 길을 준비하면서도 두려움 대신 유머와 풍자를 선택한다. “내 수의엔 기필코 주머니를 달 것이다”라는 장면은 죽음을 비극이 아닌 자기만의 방식으로 전유하는 결단을 보여준다.
느릿느릿 걸어가는 발걸음은 체념이 아니라 자유의 선언이다. 실존주의적 관점에서, 죽음은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사건이며, 그 순간 인간은 자기 존재의 진정한 의미를 마주한다. 시 속 화자는 거드름과 여유를 담아 죽음을 맞이하며, 그 과정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가 은유적 긴장으로 드러난다.
“일회용 아닌 여정이 가당키나 하든가”라는 구절은 삶의 단회성을 상기시킨다. 꽃이 피고 지는 순간처럼, 인간의 삶 또한 한 번뿐인 유일한 여정이다. 그러나 화자는 덧없음을 두려움이 아닌 초연함으로 받아들이며, 찰나 속에서도 삶의 아름다움을 길어 올린다.
마지막 호명, “내 사랑 아나키스트여 부디 홀로 가시라”는 죽음의 고독을 축복으로 전환한다. 아나키스트는 질서와 억압을 넘어 홀로 서는 존재이며, 그 홀로의 길이 바로 자유다. 사랑과 고독, 농담과 숭고가 교차하는 순간, 시는 독자에게 묻는다. 당신은 어떤 방식으로 자기만의 수의에 주머니를 달 것인가.
박시교의 시는 단순한 죽음의 노래가 아니다. 삶과 죽음, 고독과 자유, 덧없음과 초연함 사이에서 은유적 긴장미를 펼치며, 우리에게 자기 존재를 성찰하도록 초대하는 작품이다.
김강호 시인

1960년 전북 진안 생
199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조집 『당신 생각 소나기로 쏟아지는 날』외 다수
2024년 44회 가람문학상 수상
고등학교 1학년 교과서 「초생달」 수록
코리아아트뉴스 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