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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강호의 시조 아카데미 45] 박정호의 “세량지에서”

시인 김강호 기자
입력
“존재의 상처와 기억의 깊이를 그린 풍경화”

세량지에서

 

박정호

 

떠나서 잊어진다면 날마다 걸었으리라

소리쳐서 비워진다면 쑥국 쑥국 울었으리라

그래서 살아진다면, 어디서든 어떡해서든

 

딸깍발이 절뚝거리는 멀고 먼 이 지상을

오는 것이니, 떠나가서 저며 저며 오는 것이니

몸이야 던져진 채로 마음 부려 가는 것

 

꽃그늘 산그늘 물빛도 깊은 하늘

놓아버리고 잃어버리고 갈 수가 없다 갈 곳 없이

세량지* 잠긴 길 위에 풍경으로 서 있다

 

*세량지: 물에 잠긴 풍경이 아름다워 사진 명소로 이름난 곳. 화순 소재. 

세량지 [사진 : 화순군청]

박정호의 「세량지에서」는 떠남과 남음, 몸과 마음, 기억과 망각의 긴장을 한 폭의 수묵화처럼 펼쳐 보이는 작품이다. 이 시조에서 세량지는 단순한 지명이 아니다. 물에 잠긴 길과 풍경을 간직한 장소라는 점에서, 그것은 곧 잠겨 있으나 사라지지 않는 기억의 심연이다.

 

첫 수에서 화자는 떠나서 잊어진다면 날마다 걸었으리라라고 말한다. 떠남이 곧 망각이라면, 그는 오히려 더 자주 떠났을 것이라 고백한다. 이는 떠남이 결코 잊음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역설을 드러낸다. “소리쳐서 비워진다면 쑥국 쑥국 울었으리라는 구절 또한 같다. 울음이 비움이라면, 그는 마음껏 울었을 것이다. 그러나 울어도 비워지지 않고, 떠나도 잊히지 않는 것이 인간의 마음이다. 여기서 반복되는 가정법은 삶의 불가능성을 환기한다. 잊을 수 없고 비울 수 없기에, 우리는 살아낸다기보다 그래서 살아진다’. 이 표현에는 체념과 의지가 동시에 스민다.

 

둘째 수의 딸깍발이 절뚝거리는 멀고 먼 이 지상은 존재의 조건을 상징한다. 딸깍발이는 한쪽이 모자란 발을 지닌 존재다. 절뚝거림은 불완전한 인간의 삶을 은유한다. 우리는 완전한 보행자가 아니라, 상처를 안고 걷는 자들이다. “오는 것이니, 떠나가서 저며 저며 오는 것이니라는 구절은 삶이 단선적인 직선이 아님을 말한다. 떠남과 돌아옴이 분리되지 않고, 떠나면서도 다시 오는 순환적 구조 속에서 존재는 상처를 저며간다. 몸은 던져진 채로있으나, 마음은 부려 가는 것이다. 이는 실존적 조건을 드러낸다. 인간은 주어진 세계 속에 던져진 존재이지만, 그 안에서 마음만은 방향을 정하려 애쓴다.

 

마지막 수에서 세량지는 더욱 선명한 상징으로 떠오른다. “꽃그늘 산그늘 물빛도 깊은 하늘은 겹겹의 그늘과 빛이 중첩된 풍경이다. 이는 단순한 자연 묘사가 아니라, 기억의 층위를 보여 준다. 그러나 놓아버리고 잃어버리고 갈 수가 없다 갈 곳 없이라는 구절에서 화자는 결단하지 못한다. 놓으면 가벼워질 터인데, 잃으면 자유로울 터인데, 그는 그러지 못한다. 세량지에 잠긴 길은 물속에 있지만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보이지 않되 존재하는 길이다. 화자는 그 길 위에 풍경으로 서 있다.”
 

풍경은 관조의 대상이 아니라, 화자 자신이다. 그는 길을 건너는 자가 아니라, 잠긴 길 위에 서서 스스로 풍경이 된다. 이는 삶을 통과하지 못한 자의 자조가 아니라, 삶의 한가운데서 멈추어 선 자의 자각이다. 세량지는 결국 인간 내면의 저수지다. 잊지 못한 것들이 가라앉아 있으되, 물빛에 반사되어 더욱 선명해지는 장소. 떠남과 남음, 비움과 채움, 몸과 마음의 갈등을 끌어안은 채, 화자는 그 위에 서 있다.

 

이 시조는 화려한 감정보다 절제된 어조로, 존재의 상처와 기억의 깊이를 그려 낸다. 세량지는 사진 명소가 아니라, 삶의 내면을 비추는 거울이다. 그리고 그 거울 앞에서 우리는 모두 잠긴 길 위의 풍경으로 서 있는 존재임을 깨닫게 된다.

김강호 시인 

김강호 시인

1960년 전북 진안 생 

199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조집 『당신 생각 소나기로 쏟아지는 날』외 다수

2024년 44회 가람문학상 수상 

고등학교 1학년 교과서 「초생달」 수록

코리아아트뉴스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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